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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의균

지난해 글로벌 미술품 시장엔 한파가 거셌다. 미술품 시장 조사 기관인 아트마켓리서치가 집계하는 ‘올 아트 지수’에 따르면 지난해 11월까지 1년 동안 경매를 통해 거래된 미술품의 가격은 18.2% 하락했다. 부유층의 투자 대상이었던 고급 와인의 가격도 뚝 떨어졌다. 와인 시장 조사 기관 리벡스(Liv-ex)가 영국에서 팔리는 와인·샴페인 가격을 바탕으로 계산한 ‘파인 와인 1000 지수’는 지난해 11월 초까지 1년 동안 11.6% 추락했다. 명품 시계의 중고 가격(블룸버그 서브다이얼 시계 지수) 역시 지난해 한 해 동안 5.7% 떨어졌고, 1캐럿짜리 다이아몬드 가격 역시 7.4% 떨어졌다.

투자 대상이자 과시의 수단으로 잘 나가던 사치품의 지위가 휘청이고 있다. WEEKLY BIZ가 글로벌 금융사·컨설팅 업체에 최근 명품 시장이 이처럼 위축되는 이유를 묻자 “사치품을 대신할 ‘라이벌 투자처’가 너무 잘 나가고 있는 데다, 중국인들이 지갑을 닫고 있기 때문”이란 답변이 나왔다.

◇주식·코인 잘 나가는데 굳이…

사치품 시장이 지난 한 해 동안 맥을 못 춘 건 미국 등 주요국의 주식 시장에 강세장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주식 등 금융 자산과 사치품과 같은 대체 자산은 투자자들의 자금을 놓고 경쟁하는 라이벌 관계다. 그런데 지난해 인공지능(AI) 기술 발전에 대한 기대감 속에 주식 시장으로 자금이 대거 몰리면서, 미술품 등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줄 수밖에 없었다. 이에 지난해 11월 초까지 1년 동안 S&P500 지수는 35.2% 오른 반면, 같은 기간 미술품(-18.2%)과 와인(-11.6%) 투자에선 손실이 불가피했다.

그래픽=김의균

가상 화폐의 인기 역시 사치품 시장에 새로운 위협이 됐다. 지난해 11월 초까지 1년 동안 가상 화폐 대장주 비트코인의 가격은 96.1% 상승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주 언급해 더 관심을 끈 도지코인은 같은 기간 131.2% 오르기도 했다. 젊은 부호들일수록 전통적인 금융 상품에 대한 대안으로 가상 화폐를 주목하는 경향은 더욱 또렷했다. 지난해 뱅크오브아메리카 프라이빗뱅크가 300만달러(약 44억원)가 넘는 자금을 굴리는 투자자들을 조사한 결과 젊은 투자자(21~43세)들은 기성세대 투자자들과 비교하면 주식이나 채권 투자 비율이 낮다고 집계됐다. 대신 이들의 자금이 향한 곳은 가상 화폐였다. 심지어 자신이 “보수적인 투자자”라고 답한 젊은 자산가들조차 자신의 포트폴리오에서 가상 화폐가 차지하는 비율이 17%에 달했다. 불과 몇 년 전이라면 분산 투자 차원으로 미술품이나 고급 와인 등에 투자됐을 수 있는 자금이 최근엔 가상 화폐라는 신종 자산에 빨려들어가는 셈이다.

◇높은 금리와 관세 전쟁

여전히 높은 금리 역시 사치품 소비를 위축시키는 요인이다. 다나 프러시안 뱅크오브아메리카 프라이빗뱅크 선임부사장은 “높은 금리와 물가가 명품 수집가들의 구매 욕구를 억누르고 있다”고 했다. 2022년 이후 미국 연방준비제도 등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금리를 끌어올리면서 투자자들의 여유 자금은 줄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고(高)금리가 유지되면서 ‘이자가 붙지 않는’ 사치품에 대한 투자 매력은 더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문제는 최근 미국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다시 고개를 들며 “고금리가 보다 장기간 지속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는 점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이 오는 20일 취임하면 글로벌 관세 전쟁이 벌어져 고가 상품 수요를 더 흔들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2019년 미국 정부는 유럽연합(EU)이 항공기 제조사인 에어버스에 불법 보조금을 지급했다는 이유로 유럽 와인과 위스키 등에 25%의 보복 관세를 부과했다. 2021년 중국은 호주산 와인에 대해 최대 218%의 반덤핑 관세를 부과했는데, 이는 호주가 2018년 중국 화웨이의 5G 네트워크 참여를 금지한 데 이어 2020년 코로나의 기원에 대한 국제 조사를 요구한 것에 대한 보복 성격이었다.

◇지갑 닫는 중국인들

사치품 시장의 ‘우수 고객’이었던 중국인들이 지갑을 닫고 있다는 점 역시 사치품 업계의 큰 걱정거리다. 미국와인경제학자협회(AAWE)에 따르면 중국 와인 소비량은 2017년 19억3000만L로 정점을 찍은 뒤 계속 줄어들어, 2023년엔 6억8000만L까지 줄었다. 중국의 명품 브랜드 사랑도 식어가고 있다. 중국의 경제 둔화와 주택시장 침체, 중국 정부의 반(反)부패 정책 등으로 인해 중국 소비자들이 명품 소비를 줄이면서 명품 브랜드 매출 실적이 곤두박질치고 있다는 게 블룸버그통신 등 외신 보도다.

여기에 2021년부터 시진핑 주석이 분배를 우선시하며 내건 ‘공동부유(共同富裕·다 함께 잘살기)’ 정책 역시 중국 내 부유층의 사치품 소비를 억누른다는 분석이다.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중국인들은 지난 20여 년 동안 명품 소비를 이끌어왔다”며 “그런데 이제는 중국 부동산 시장의 위기와 중국 정부의 과시적 소비에 대한 단속이 사치품 지출을 뒤흔들고 있다”고 전했다.

이 같은 분위기 속 중국의 명품시장 규모는 지난해 최대 15%까지 줄었을 것이란 게 컨설팅 업체 디지털럭셔리그룹 예측이다. 중국의 명품 소비 감소에 베르나르 아르노 LVMH(루이비통모엣헤네시) 그룹 회장은 지난해 6월 직접 베이징을 방문해 루이뷔통 플래그십 매장 개설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경험 상품’ 중시 추세도

하지만 명품 소비가 감소하는 근본 원인으로 고액 자산가들의 달라진 소비 패턴을 주목해야 한다는 해석도 나온다. 예전에 럭셔리 제품의 주요 고객이었던 부유층이 이제는 단순히 돈을 쓰는 데 그치지 않고 특별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경험 상품’ 소비를 더욱 선호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경험 상품이란 고급 호텔에서의 투숙 경험이나 초고가 식사나 여행 경험 등을 의미한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베인앤드컴퍼니는 지난해 11월 명품 시장에 대한 보고서에서 “럭셔리 (상품과 서비스) 시장은 고액 자산가를 대상으로 한 숙박이나 식사와 같은 ‘경험 상품’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명품을 소비하기보다는 고급스러운 서비스를 체험하고 싶어하는 소비자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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