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콘서트홀 바이올리니스트 윤소영(가운데)이 11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피아졸라 100주년 기념공연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사계'를 협연하고 있다.

지난 11일 롯데콘서트홀. 코리안 챔버 오케스트라(음악 감독 김민) 단원들의 연주복 상의에는 붉은 장미와 리본, 스카프가 꽂혀 있었다. 이날은 아르헨티나의 탱고 거장 아스토르 피아졸라(1921~1992)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탱고 거장의 생일을 기리기 위해 붉은 색보다 어울리는 색깔은 없어 보였다. 탱고는 무엇보다 열정과 관능의 음악일 테니까.

‘피아졸라 탄생 100주년 기념 공연’이라는 타이틀처럼 첫 곡 외에는 모두 피아졸라의 곡으로 채워졌다. 지금은 탱고가 제3세계 월드뮤직을 상징하는 장르로 대접 받고 있지만, 100여 년 전으로 돌아가면 사정은 딴판이었다. 탱고는 무엇보다 항구의 음악이었고 선술집의 음악이었으며 매음굴의 음악이었다.

피아졸라 자신의 대표곡인 ‘탱고의 역사(Histoire du Tango)’의 각 악장에도 탱고의 슬픈 역사가 고스란히 아로새겨져 있다. 1악장은 ’1900년 보르델로(Bordello)’, 2악장은 ’1930년 카페', 3악장은 ’1960년 나이트클럽’, 마지막 4악장은 ‘오늘날의 콘서트’다. 여기서 첫 악장인 보르델로는 사창가라는 의미다. 탱고는 사창가에서 카페, 나이트클럽에서 콘서트홀로 음악사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 장르였다. 그 ‘연어'와도 같은 작곡가가 바로 피아졸라였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아르헨티나의 탱고 거장 아스토르 피아졸라.

이날 전반부 연주곡인 ‘신기한 푸가’와 천사의 죽음'은 탱고의 격정을 바로크의 푸가 형식에 녹여 넣은 곡들이다. 어릴 적 피아졸라는 탱고를 한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긴 적이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탱고 음악가의 정체성을 되찾은 곳은 대서양 건너편의 프랑스 파리였다. 정부 장학금을 받고 유학길에 오른 피아졸라는 파리에서 여성 음악 교육자이자 지휘자, 건반 연주자였던 나디아 불랑제를 만났다. 피아졸라는 우선 클래식 자작곡을 보여줬지만, 스승의 눈에는 차지 않았다. 반대로 그가 탱고를 보여줬을 때 불랑제는 피아졸라의 두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피아졸라야. 절대로 그만두지 말게.” 피아졸라는 불랑제 밑에서 공부하면서 음악의 기초를 다시 닦았고, 탱고 음악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비로소 되찾았다.

피아졸라는 탱고에 재즈와 클래식, 현대음악의 어법을 녹여넣으면서 혁신과 현대화를 꾀했다. 피아졸라는 재즈 밴드나 실내악단처럼 5중주단(Quintet) 같은 소편성을 즐겼고, 게리 멀리건(색소폰)이나 게리 버튼(비브라폰) 같은 재즈 명인들과도 스스럼없이 호흡을 맞췄다. 동시에 그는 탱고가 현대음악이나 고전의 범주에 포함될 만한 보편성이 있는 장르라는 걸 입증해야 했다. 피아졸라의 ‘탱고 혁명’은 오늘날 ‘새로운 탱고(Nuevo Tango)’로 불린다.

그의 자의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 이날 후반부 연주곡인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사계(四季)’다. 작품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듯이 이탈리아의 바로크 작곡가 비발디의 ‘사계’에서 영향을 받은 곡이다. 실제로 피아졸라는 작품 중간중간에 비발디의 멜로디를 인용하면서 선배 작곡가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지글거리는 현(絃)의 거친 질감과 미끄러지는 듯한 끝음 처리, 가볍게 몸통을 치면서 타악기처럼 활용하는 연주법까지 모두 탱고를 음악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방법들이다. 가끔씩 음정이 살짝 엇나가거나, 호흡이 가빠졌지만 문제는 없었다. 교실에서 음악 시험 치듯이 뜨거운 탱고를 연주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이날 협연한 바이올리니스트 윤소영은 자신의 악기와 단둘이 ‘이인무(二人舞)’라도 추듯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면서 자신감을 과시했다. 탱고의 거장을 향한 헌정은 이날 무대로 끝나지 않는다. 올해 피아졸라 100주년을 맞아서 반도네온 연주자인 고상지가 음반을 발표할 예정이고,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역시 최근 자신의 두 번째 음반에 ‘탱고의 역사’를 담았다. 양인모의 말이야말로 피아졸라의 매력을 그대로 전하는 것만 같다. “피아졸라는 어디를 찔러도 같은 피가 나온다. 바로 탱고라는 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