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동(93)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이 지난 23일 별세했습니다. 항일 비밀결사조직인 조선민족대동단 총재 김가진 선생의 손자이자, 독립운동가 김의한·정정화 부부의 아들인 김자동 회장은 열 살 때인 1939년부터 독립운동 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부친을 도와 광복군 단파방송과 선전지 발행 작업 등을 수행했던 것이죠.
그는 열여덟 살에 광복을 맞을 때까지 임시정부와 풍찬노숙을 함께했으며, 김구, 이동녕, 이시영 같은 임정 요인들의 품에서 자라며 ‘임정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특히 부친 김의한과 의형제를 맺었던 백범 김구에게는 ‘아저씨’라 부르는 관계였다고 합니다.
광복 후 그의 부모는 단정(單政)을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이 때문에 임정 인사 중 대한민국 정부에 참여한 이시영, 이범석, 신익희 등과 소원해졌다고 합니다. 김자동 회장은 조선일보와 민족일보 기자로 일하다 언론계를 떠난 뒤 민주화와 평화통일 운동의 길을 걸었습니다. 수정주의 역사학의 대표적 저서로 국내에 1986년 출간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을 번역한 사람이 바로 김 회장이었습니다.
김자동 회장을 4년 전에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회고록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푸른역사)을 출간한 것이 계기였습니다.(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0/18/2018101800012.html) 가족처럼 지내던 임정 요인들의 일상을 그는 이 책에서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어머니 정정화 여사가 식사를 준비하면, 앉아서 기다리던 김구는 어린 김 회장을 품에 안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당시 기사에서 쓰지 못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책 속 증언 중 무척 민감한 비화(祕話) 하나가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중근(1879~1910) 의사에게는 동생 두 명이 있었습니다. 안정근(1885~1949)과 안공근(1889~?), 두 사람 모두 형의 뒤를 좇아 항일투쟁에 헌신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안중근 의거 뒤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갔던 형제는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임정 총리였던 도산 안창호는 안공근을 외무차장 겸 러시아 대사에 임명했습니다. 1922년에는 모스크바로 가 레닌으로부터 임정에 대한 지원을 받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30년 김구의 주도로 한국독립당이 창당되자 안공근은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1931년 김구의 한인애국단에도 깊이 관여했는데, 그해 이봉창 의사의 선서식이 열린 곳이 안공근의 집이었고, 1932년 윤봉길 의사가 태극기를 들고 사진을 촬영한 장소는 안공근의 차남 안낙생의 집이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안공근은 ‘김구의 오른팔’로 불린 최측근 인사였습니다. 일제 고등경찰의 문건에는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안공근은 김구의 참모로서 그 신임이 가장 두텁고 김구가 범한 불령(不逞) 행동은 안중근의 보좌에 의해 행해진다.’ ‘불령’이란 ‘불만이나 불평을 품고 구속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뜻으로, 일제가 자기들 입장에서 저항적인 조선인에게 썼던 편견 가득한 상투어였습니다. 그러니 일제가 ‘불령’이라고 쓴 것은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했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것입니다. 안공근은 독립운동 세력의 좌우 통합과 연대를 위해서도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안공근에게 권한이 집중되면서 뭔가 잡음이 새 나왔다고 합니다. 안공근의 휘하 대원 몇 명이 불만을 품고 조직에서 이탈했는가 하면, 1937년에 결정적으로 김구의 신임을 잃으면서 사실상 독립운동 무대에서 퇴장하게 됐다는 것이죠.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해 일본군이 상하이를 공격하자 김구는 안공근을 그곳에 파견해 안중근 집안의 일가족을 구출해 오도록 지시했으나 안공근은 자기 가솔만 데리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당시 안공근을 향한 분노를 드러냈습니다. “나는 크게 꾸짖었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김구가 안공근을 믿지 않게 된 것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바로 ‘자금’이었죠. 김자동 회장은 회고록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후 중국인들이 모아준 성금 일부를 안공근이 사적으로 유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러자 자연히 백범과도 거리가 생겼다.”
사태가 악화되자 안공근은 형 안정근이 머무르고 있던 홍콩으로 피신했고, 한동안 임정과 거리를 두고 지내다 베트남 하노이와 윈난성을 거쳐 1939년 봄 가족과 함께 충칭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충칭은 중일전쟁 중 중화민국(중국 국민당 정부)의 임시 수도였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1939년 5월 30일.
안공근이 실종됐습니다.
그 뒤로 안공근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어떤 기록에도 안공근의 활동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중국 정부가 수사에 나섰지만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다만 ‘중국 공안 당국이 중·일 이중간첩의 소행으로 결론을 내렸지만 주범으로 지목된 중국인이 영국 시민권을 갖고 있고 확실한 증거가 없어 기소하지 못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좀 기이하게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나 두산백과 같은 국내 대표적인 백과사전의 ‘안공근’ 항목은 이 실종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독립운동 활동을 했다는 서술 뒤에 갑자기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죽은 사람에게 훈장을 줌)됐다는 기록으로 건너뜁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안중근 의사의 친동생이자 독립운동에 투신해 임정의 요인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중요한 인물이 갑자기 사라졌는데, 80년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니?
실로 ‘독립운동사의 미제(未濟) 사건’이라 할 만한 이 사건에는 네 가지 설이 있는데, 모두 안공근은 누군가에게 피살당했다는 결론입니다.
① 일제 밀정 살해설.
② 중국계 마적단 살해설.
③ 김구 측근 살해설.
④ 기호파 독립운동 계열 살해설.
김자동 회장은 “전부 추정일 뿐 물증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낙연 전 국무총리 재임 시절 총리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운동사 연구자 정운현씨의 글에 따르면, 독립운동가 정화암(1896~1981)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안공근이 독립운동 자금 명목으로 중국 정부에서 거금을 받아 멋대로 낭비해 백범이 공근을 질책한 후 두 사람이 소원해졌다. 그 후 공근이 장개석(장제스) 정부의 정보기관과 손잡고 백범을 제거하려 하자 백범이 이를 알고 공근을 중국 정부와의 교섭 업무에서 배제시켰는데, 그 뒤 공근의 소식이 두절되었다.” 백범 전문가인 도진순 창원대 교수는 2016년 8월 24일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양측(백범 측과 안공근 측)의 갈등이 심상치 않은 단계로까지 발전했을 것”이라 했고, 여기서 좀더 나아간 말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2018년 출간된 회고록에서 김자동 회장은 무슨 말을 했던 것일까요. 이 부분 두 문단을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괄호는 기자가 넣은 것)
<그해(1939년) 여름이었다. 충칭의 여름밤은 너무 더워서 마당에 모기장을 치고 자야 했다. 그날 밤 나는 어머니(정정화)와 한 모기장에서 자고 그 옆 모기장에는 백범의 주치의 유진동 선생의 부인 강영파 여사가 딸 수란을 데리고 잤다. (중략)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던 강 여사는 남편이 (내연 관계인) 중국인 간호사를 데리고 사는 데는 속사정이 있다며 놀라운 이야기를 하나 털어놨다.
언젠가 일단의 한인 청년들이 밤에 유진동 선생의 병원으로 안공근의 시신을 들고 왔는데 유 선생이 중국인 내연녀와 함께 그 시신을 ‘처리’했다는 것이다. 유 선생은 아내 강 여사에게 자신의 외도를 변명하면서 “간호사가 이런 내용을 다 알고 있는데 어떻게 함부로 버리느냐, 그 여자 말 한마디면 바로 소문이 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데리고 산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날 밤에 들은 이야기가 하도 충격적이어서 이튿날 나는 어머니에게 다시 그 일을 물어봤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절대로 밖에 발설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김자동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 106~107쪽)
김자동 회장은 이어 “남편에게 해가 될지도 모르는 그런 엄청난 얘기를 강 여사가 굳이 지어내서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사실일 것”이라며 “그 한인 청년들이 유진동 선생과 특수관계가 아니었다면 변사체를 ‘처리’해 줬을 리가 없다”고 썼습니다. 일종의 공범이 돼버린 유진동은 그 이후 백범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한인 청년들이 안공근을 살해한 이유에 대해서는, 처음엔 돈을 좀 내놓으라고 협박했던 것이 구타하는 과정에서 사망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책의 그 대목을 읽은 저 역시 놀랍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김자동 회장을 인터뷰할 때 그 부분에 대해 조심스럽게 질문했습니다. 김 회장은 좀 당혹스런 표정으로 “책에 그 내용을 담을지 말지 무척 고민했다”고 했지만 “모두 사실대로 적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질문했습니다. “그 한인 청년들이 구체적으로 누구누구인지 대략 짐작이 간다고 하셨는데, 임정 계열의 청년들이란 의미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임정 계열의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김 회장은 곧바로 “하지만 그 사건에 대해 백범 김구 선생은 알지 못했고, 살해를 지시한 것도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공근의 장남 안우생은 충칭 시절부터 1949년 백범이 서거할 때까지 백범의 비서로 일했습니다. 백범이 자기 아버지 살해 지시를 내린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랬을 리가 없죠. 더구나 안공근의 조카딸(안정근의 장녀) 안미생은 바로 백범의 며느리였습니다.”
훗날 안공근 자녀의 운명은 남과 북으로 갈렸습니다. 장남 안우생은 6·25 이후 월북해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힌 반면, 장녀 안연생은 1951년 제6차 유엔총회에 장면 박사 등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했고, 37세였던 1953년 이승만 정부의 공보처장 서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김자동 회장이 회고록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에 싣지 않은 대목이 있었습니다. 2010년 4월 1일 한겨레신문에 실린 ‘임정의 품 안에서’ 62회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2년 전으로 기억나는데, 6월 26일 백범 선생 기일에 참배하러 효창공원 안으로 올라가던 중 두 사람을 중간에서 만났는데, 나에게 “안공근씨의 시신을 유진동씨 병원에서 처리했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무척 놀라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결국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네요” 하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60년 동안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는 그 비밀을 알고 있었던 ‘두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김자동 회장은 끝내 말하지 않았습니다. 유진동은 광복 후 임정 요인들과 함께 입국했다가 중국으로 돌아갔고 1957년 월북했다고 하며,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기사에 미처 쓰지 못했던 증언을 이제서야 이렇게나마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