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팝 슈퍼스타 테일러 스위프트의 팬덤 ‘스위프티’는 막강하다. 국내 스위프티 열정 역시 어느 나라에 뒤지지 않는데, 지난 여름엔 상당수가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북미에서 신드롬을 일으킨 스위프트의 '디 에라스 투어'의 일본·호주·싱가포르 공연 예매에 외국인 자격으로 참여를 해서 번거로운 일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표를 구한 이들도 극소수였다.
스위프트는 내년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에선 세 나라에서만 '디 에라스 투어'를 연다. 그 해 2월 일본 도쿄 네 번, 같은 달 호주 멜버른과 시드니에서 각각 두 번, 싱가포르에서 여섯 번 공연한다. 그런데 K팝의 영향으로 세계 음악 시장에서 주목 받고 있는 한국은 쏙 빠져 있다.
지난 2017년 4월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첫 내한공연해 10만명을 끌어모았던 브릿팝 밴드 '콜드플레이'도 이번 아시아·호주 투어에서 내달 일본(2회)에선 공연하는데 이웃한 한국은 찾지 않는다. 일본 외에 대만,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호주 등에서 공연한다. 콜드플레이는 글로벌 슈퍼 그룹 '방탄소년단'(BTS) 등과 협업한 지한파 밴드로 알려져 있다.
◆올림픽주경기장 공사…공연장이 없다
스위프트와 콜드플레이가 한국을 찾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공연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스위프트와 콜드플레이 콘서트는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붓는 화려한 무대와 연출로 유명한데, 수지타산을 맞추기 위해선 5만여 안팎의 관객을 끌어모을 수 있는 스타디움 같은 대형 공연장에서 여러 차례 공연해야 한다. 국내에선 올림픽주경기장과 마포구 서울월드컵경기장 정도가 있다. 하지만 노후화된 올림픽주경장은 리모델링 공사를 착공했다. 준공 예상 시기는 2026년 말이라 그 기간 대형 팝스타의 내한공연은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이곳에선 콜드플레이 외에 마이클 잭슨, 레이디 가가, 폴 매카트니, 브루노 마스 등이 공연했다. 조용필, 서태지, 방탄소년단, 아이유 등 국내 톱 가수들도 섰던 무대다.
국내 프로축구 K-리그의 FC 서울의 홈구장이자 축구 국가대표 홈경기가 주로 열리는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잔디 훼손 우려로 K팝 콘서트 대관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실제 지난 8월 '잼버리 K팝 콘서트' 이후 10억원 대 잔디 훼손으로 갑론을박이 일기도 했다. 더구나 두 경기장은 야외 공연장이라 스위프트, 콜드플레이가 아시아 투어를 도는 겨울엔 애초부터 사용할 수도 없다. 서울 시내에 대형 실내 공연장은 고척스카이돔과 케이스포돔인데 각각 2만여명과 1만여명이 수용 가능하다.
최근 3만명 규모로 첫 내한공연한 미국 팝스타 포스트 말론은 서울 시내에 마땅한 장소가 없어 경기 고양 일산 킨텍스의 두 홀을 하나로 합쳐 공연하기도 했다. 킨텍스는 전시회 등이 주용도인데 공연장이 없다 보니 상당수의 국내 가수들도 자주 이용하는 곳이다. 일본엔 도쿄돔, 교세라돔 오사카 등 날씨와 상관 없이 공연을 할 수 있는 대형돔 공연장이 여러 개가 있다.
◆국내 가수들도 대관 치열…나훈아, 올해 연말 투어 서울 없어 국내 가수들도 공연장 대관이 치열한 건 마찬가지다. 올해 엔데믹 시대로 접어들면서 3, 4년 만에 여는 국내 가수들의 콘서트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톱 가수들이라고 해도 한정돼 있는 대형 공연장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케이스포돔이 주로 대관 장소인데 이달 만해도 15일까지 공연하는 김동률에 이어 영국 팝스타 샘 스미스 그리고 임영웅이 공연한다. 내달엔 god, 트레저 등이 예정돼 있다. 심지어 최근 몇 년 동안 매년 케이스포돔에서 공연한 나훈아는 이번 투어의 수도권 공연 장소로 일산 킨텍스(12월 30~31일)만 잡았다. 김동률, 임영웅은 막강한 티켓 파워를 과시하는 가수들로 회당 1만여석이 부족해 2주간 여섯 차례 공연하는 방식을 택해야 했다. 고척스카이돔은 12월 초 '투모로우바이투게더' 콘서트가 끝나고 약 4개월 간 내부 공사에 들어가 콘서트업계 대목인 연말과 연초에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다.
◆콘서트장, K팝 산업 확대하는데 핵심…공연장 늘려야
K팝 업계는 공연장이 추가로 지어져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공연장은 하루 아침에 뚝딱 지어지는 게 아니다. 숱한 계획들이 세워졌다, 엎어지거나 변경됐다. 카카오가 사업비를 지원하는 서울 창동의 K팝 전문 공연장 '서울 아레나', CJ라이브시티가 고양에 건설 중인 K팝 전문 공연장 'CJ라이브시티 아레나'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이유다. 올해 하반기엔 인천 영종도에 1만5000석 규모의 다목적 공연장 '인스파이어 아레나'가 문을 열 예정이다.
올해 스위프트의 투어로 인한 경제적 파생효과를 가리키는 '스위프트노믹스(Swiftonomics)'(스위프트+이코노믹스)가 북미뿐 아니라 국내 공연업계에서 크게 화제가 된 것에서 보듯, 콘서트 투어는 음악을 넘어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다.
K팝을 이끄는 방탄소년단과 '세븐틴'(SVT) 등이 속한 하이브(HYBE)가 '도시형 콘서트 플레이 파크'를 표방하며 전개 중인 '더 시티(THE CITY)'도 콘서트 투어의 힘을 인지한 프로젝트다. 작년 미국 라스베이거스 방탄소년단 콘서트와 세븐틴 일본 콘서트와 맞물려 진행했는데 대형 공연장에서 장기간 공연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음악 대형 공연장이 부족한 국내에선 힘든 형태다. 그렇지 않으면 작년 10월 2030부산세계박람회 유치 기원으로 부산에서 열렸던 방탄소년단 '더 시티'처럼 대형 이벤트와 맞물려야 가능하다. K팝 콘서트를 중심으로 한 해외 관광객을 유치하는 것이 가능함에도 K팝 팀들은 공연장 등 인프라가 없어 해외 공연에 주력해야 하는 상황도 발생하고 있다. 유럽 투어를 꾸준히 돌고 있는 K팝 그룹 관계자는 "현재 K팝 업계에 소프트웨어(K팝 그룹)는 넘치는데 하드웨어(공연장)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공연 인프라가 더 갖춰진다면 해외 관광객은 더 늘어날 것이고 경제도 더 활성화될 수 있다"고 봤다.
한국관광공사 '한류관광시장조사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 이전인 2019년 한류 관광객 규모는 전체 인바운드 관광객 수의 7.4%인 약 111만명을 기록했다. 이들의 대다수가 K팝 선호도가 한국 관광을 결정한 요인이라고 답했다. 이들은 당시 1인당 평균 120만 원가량을 지출했다.
◆공연실황 영화관 상영도 주목
공연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K팝 업계가 관심을 갖게 된 건 공연 실황 영화의 극장 개봉이다. 그간 K팝 콘서트 공연실황을 영화관에서 생중계하는 이벤트는 자주 있었다.
그런데 스위프트의 '디 에라스 투어'를 스크린으로 옮긴 동명의 영상이 최근 북미에서 개봉해 첫주에만 2000억원가량의 수익을 낸 것으로 추정되면서 영화 형태가 크게 주목 받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지난달 13일 개봉한 '아이유 콘서트: 더 골든 아워'가 누적관객 8만명을 끌어모으는 등 예상보다도 좋은 박스오피스 성적을 거뒀다. 아이유가 작년 9월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어 이틀 간 9만명을 불러 모은 콘서트를 스크린으로 옮긴 공연 실황 영화다. 국내 공연 실황 영화 처음으로 CGV IMAX 특별관에서 상영됐다. 아이맥스 관람료는 2만4000원('싱어롱 상영'은 2만7000원)으로 보통 영화 관람료보다 1만원 안팎 높은 편인데, 비싸다고 여기는 관객은 드물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다.
아이유와 스위프트 공연 실황 영화의 흥행은 당연하게도 두 스타의 인기를 기반 삼는다. 좌석이 한정돼 있는 만큼, 두 스타의 콘서트 현장에 가지 못한 팬들이 수두룩하다. 반면 영화 관람은 비교적 쉽게 티켓 예매가 가능하다. 특히 아이유와 스위프트의 공연은 화려한 대형 연출로 각자 객석에서 미처 포착하지 못한 장면들을 극장에서 다양한 뷰(view)로 포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또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콘서트도 편하게 관람하고 싶은 관객들의 욕망도 반영됐다. 당연히 콘서트는 현장성이 중요하다. 하지만 아이유, 스위프트처럼 대형 스타의 콘서트장에 가긴 위해선 하루 또는 이틀 그 이상의 시간이 소비될 수 있다. 공연 실황 영화의 경우 대기 없이 바로 입장이 가능하고 이동도 상대적으로 번거롭지 않다. 국내에선 내달 3일 개봉 예정인 스위프트의 '디 에라스 투어' 흥행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할 경우 또 다른 시장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미국 팝 슈퍼스타 비욘세도 올해 연말에 공연실황 영화 개봉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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