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의 손아귀에 들어간 아프가니스탄에서 무너진 기존 정부를 지지하는 반군 세력이 일부 지역을 탈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미국의소리(VOA) 방송은 21일(현지 시각) “축출된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지지하는 반군들이 북부 세 곳의 지역을 탈레반으로부터 탈환했다”고 보도했다. VOA는 “탈레반 연계 소셜미디어 계정에서 북부 바글란 주 전세가 탈레반에서 정부군 지지세력 쪽으로 역전됐음을 확인했다”고 전했다. 이 지역 교전 과정에서 탈레반 대원 최소한 15명이 사망하고 15명이 다쳤다는 것이다. 현지 사령관 압둘 하미드는 “탈레반에 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다”고 밝히고, “바글란 주 전체를 다시 탈환할 것”이라고 말했다. 탈레반 저항 세력이 운영하는 트위터 계정은 “탈레반이 바글란을 다시 빼앗기 위해 쿤두즈에 있던 병력을 급파했다”고 22일 보도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곧 바글란에서 탈레반과 기존 정부세력과 무력 충돌이 벌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앞서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전체 34주 중 카불 북부 판지시르와 파르완 두곳을 장악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판지시르에서 암룰라 살레 부통령과 국민영웅 고(故) 아흐마드 샤 마수드 장군의 아들 아흐마드 마수드가 반군 세력을 규합하기로 하면서 탈레반에 맞설 최후의 거점으로 지목됐다. 그런데 여기에 바글란주에서도 일부 지역이긴 하지만 탈레반 세력이 격퇴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바글란주 역시 판지시르주·파르완주와 함께 카불 북쪽에 위치한다. 반군 세력이 연계돼 카불 북부가 저항의 거점으로 세력을 확대될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북부 3주에서의 저항이 거세질 경우 탈레반은 카불 주둔 병력의 상당수를 이곳으로 파견해야 할 수 있고, 이 틈을 타 카불 장악력이 약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그러나 과거 반군 세력을 물밑지원했던 열강들이 모두 자국민 탈출에 골몰하고 있기 때문에 탈레반에 대한 저항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여전히 우세하다.
한편 이런 상황에서 탈레반은 국가 수립을 선포하며 ‘정상국가’ 꼴을 갖춰 국제사회에 존재감을 인정받는데 주력하는 양상이다. 탈레반은 앞서 지난 19일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Islamic Emirate of Afghanistan)’ 수립을 선언했다. 이 이름은 20년전 이슬람 근본주의를 앞세워 폭정을 실시했을 때와 같은 이름이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에 민주주의는 없을 것”이라고도 공언했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아프가니스탄이 영국의 식민통치 종료를 기념해 지정한 102주년 독립기념일이기도 했다. 탈레반은 “용감한 전사들이 또 다른 오만한 강대국 미국을 물리쳤다”고도 주장했다. 탈레반의 카불 함락 당시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이 국민과 정부를 팽개치고 아랍에미리트로 도주한 가운데 정부 측 인사 중에서 압둘라 압둘라 국가화해최고위원회 의장과 하미드 카르자이 전 대통령은 탈레반 지도부와 만나 과도정부 구성과 관련해 의견을 나누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탈레반이 자신들을 정상국가로 인식시켜서 국제사회에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는 시도의 하나로 풀이된다.
그러나 탈레반의 권력 장악 속에 거물급 테러리스트들이 속속 카불로 입성하며 권력분점에 나서는 동향도 감지된다. 특히 수도 카불의 치안을 하카니네트워크가 맡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카니네트워크는 각 무장세력의 연합체 성격을 갖고 있는 탈레반 중에서 군수·물자 분야에서 큰 영향력과 지분을 확보한 그룹이다. 이들은 9·11 테러를 일으킨 알 카에다와도 연계된 세력으로 알려졌다. 특히 미 정부는 하카니네트워크를 테러단체로 지정했다. 미 재무부는 하카니네트워크의 우두머리인 칼릴 알라흐만 하카니에 50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어놓았는데, 거물급 테러리스트가 이끄는 테러단체가 수도의 살림을 맡게 된 셈이다.
이날 칼릴 알라흐만 하카니도 탙레반 대표단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압둘라 의장은 칼릴 알라흐만 하카니가 카불 시민을 잘 보호하기 위해 열심히 일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VOA는 보도했다. 기존 정부 고위관료가 테러 조직의 우두머리이자 공식 수배자를 수도 치안 책임자로 인정해주는 발언을 하는 모양새가 됐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전 영국 외교관 이보르 로버츠 전 영국 외교관은 VOA에 “하카니네트워크에 수도 카불의 치안을 맡기는 것은 여우에게 닭장을 맡기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