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의 번화가 창안(長安)가에 인접한 ‘LG 베이징 트윈타워’는 2005년 완공 후 중국 속의 한국을 상징하는 심볼이었다. 지상 31층, 지하 4층 건물은 사업을 크게 확장하는 LG의 ‘중국 사령부’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LG그룹이 중국 사업을 조정하면서 싱가포르 투자청 자회사에 팔린 후, 최근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 중이다. ‘익스체인지 트윈타워’로 이름까지 바꾼 건물은 중국 최대 국영 식품 기업인 중량(中糧)그룹이 쓸 예정이다. SK그룹 베이징 빌딩은 지난해 중국 허셰보험에 매각됐고, 베이징현대자동차 1공장은 중국 전기차 회사 리샹이 인수해 내년부터 전기차를 생산할 예정이다.

1992년 한중수교… 2022년 서울 대림동 - 2022년은 한국과 중국이‘수교 30주년’을 맞는 해다. 양국은 교역량과 인적 교류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했지만, 한국의 상대적 중요성과 지위가 갈수록 축소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왼쪽 사진은 1992년 8월 24일 이상옥(왼쪽) 당시 외무부 장관과 첸치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한·중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악수하는 모습. 오른쪽 사진은 2일 중국어 간판들로 가득한 서울 영등포구 대림중앙시장 거리 모습이다. 대림동은 서울의 대표적 중국인 밀집 지역으로 꼽힌다. /AP 연합뉴스, 이덕훈 기자

중국 베이징 차오양구의 왕징은 중국 내 대표적 한국인 밀집 지역이다. ‘불이 꺼지지 않는 동네’로 불렸다. 계약을 따낸 중국 주재 기업인, 한국에서 출장 온 사람들로 거리가 붐볐다. 하지만 사드 사태에 이어 코로나 사태까지 겹치면서 요즘은 오후 10시면 가게들은 문을 닫는다. 장사를 포기한 한국인들이 떠나면서 ‘한국성’이라고 이름 붙은 상가 1층 제일 좋은 자리엔 쓰촨 음식점이 들어서 있다. 현재 중국에 체류 중인 한국인 숫자는 26만명으로 추정된다. 중국 내 상주 외국인(84만명·2020년 중국 인구 조사) 중에선 가장 많지만 2년 전 33만명(재외동포재단 통계)보단 21%나 줄었다.

크리스마스이브였던 지난달 24일 저녁 서울 지하철 대림역 8번 출구 앞 마라샹궈(매운 소스에 볶은 중국 요리) 가게 앞에는 배달 오토바이가 끊임없이 들락날락했다. 대림동은 전체 인구의 약 4분의 1인 1만3000여 명이 중국인인 서울 내 대표적 중국인 밀집 지역이다. 13년째 가게를 운영해 온 중국인 장모(48)씨는 “코로나 사태로 장사가 예전 같지는 않지만, 재한 중국인이 늘어난 덕분에 한 달 3000만~6000만원 매출을 올리고 있다”고 했다. 이 가게 손님은 대부분은 중국인이다. 중국인 전용 배달 앱(휴대전화 응용프로그램)으로 주문받는다. 장씨는 “대림동에만 최소 1000개 넘는 중국인 운영 점포가 있고 여기서 성공한 사람은 부천, 부평에 분점을 내고 있다”고 했다. 장씨도 서울 2곳과 경기도 고양시점 등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수교 30년간 교역량과 인적 교류 면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수교 후 한국의 대중 수출은 53.8배, 중국의 대한 수출은 29.3배가 됐다. 한국과 중국의 무역액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중국에서 한국의 상대적 중요성과 지위는 갈수록 축소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중국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일방주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중국이 한국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92년 4%에서 2020년 24.6%로 커졌지만 중국 시장에서 삼성 휴대폰의 시장점유율이 1% 미만으로 떨어진 것이 대표적이다. 한국이 중국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6.1%다. “중국 내 한국은 작아지는 반면, 한국 내 중국은 너무 커졌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중 무역 비율

당장 중국 정부 내 한국의 위상은 북한과 대비해도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다. 중국은 주한 중국 대사에 국장급을 보내고 있는 반면, 북한 주재 중국 대사로 임명된 것으로 알려진 왕야쥔은 차관(대외연락부 부부장)급이다. 왕이 외교부장은 최근 중국 외교부 산하 싱크탱크인 중국국제문제연구원 연설에서 2021년 대(對)아시아 외교를 평가하면서 일본, 인도 등에 이어 북한, 한국, 몽골 순으로 언급했다. 이를 두고 외교가에선 “중국 관료의 머릿속 순위”라는 평가가 나왔다. 코로나 때문이라고는 하나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두 차례 중국을 방문했지만 시 주석은 한 차례도 방한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싱하이밍 주한 중국 대사는 VIP 취급을 받는다. 싱 대사는 국회의원, 대기업 관계자들을 쉽게 접촉하며 고급 정보를 축적하고 있다. 베이징에 주재하는 주중 한국 대사는 대사관 밖을 벗어나 중국 사회의 고위 인사들을 만나는 것이 자유롭지 않다. 장하성 주중 한국 대사는 2019년 4월 부임 이후 2년 6개월 만에 처음으로 양제츠 중국 공산당 외교 담당 정치국원을 만날 수 있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베이징올림픽 ‘외교적 보이콧’ 움직임이 가속화하자 이런 분위기의 확산을 막으려 만나준 것이었다.

한국에서 중국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한국 부동산 시장에서 중국인은 ‘큰손’을 넘어 ‘거대한 손’이 됐다. 국세청에 따르면, 2017년부터 외국인이 사들인 아파트 2만3167가구 중 중국인 취득 물건은 1만3573가구(공시지가 기준 3조1691억원)로 집계됐다.

한국 대학은 “중국인 유학생이 없으면 문을 닫아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교육부에 따르면, 한국 대학에 재학 중인 중국 유학생은 5만9774명이다. 전체 외국인 유학생의 절반이다. 연세대의 경우, 지난해 지원한 외국인 학생 1600명 가운에 60% 이상이 중국인이었다. 연세대 국제처 관계자는 “중국인 학생들의 입학 지원이 급증해 최근 서류 검토 등 작업을 위해 근로장학생 10여 명을 추가 모집했다”고 했다.

반면, 중국 내 한국의 위상은 점점 작아지고 있다. 베이징 시내라고 할 수 있는 3환 안에는 삼성그룹 건물을 제외하면 한국의 존재감을 찾기 힘들다. 베이징 시내에 있는 유일한 한정식집 ‘수라’는 건물이 매각되며 2021년 문을 닫았다. 한 교민은 “몇 년 전만 해도 베이징에서 한국 브랜드 광고판이 흔했는데 이젠 눈을 씻고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중국 정부는 여전히 한국어를 공식 외국어(영어·일본어·독일어·프랑스어·스페인어·러시아어·아랍어)에 포함하지 않고 있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중국 GDP에서 양국 무역이 차지하는 비율은 2006년 5%에 가까웠지만 2020년 1.9%로 줄었다. 중국이 한국에서 수입하는 품목이 계속 줄고, 한국은 중국 원자재 등에 여전히 의존하면서 ‘을(乙)’ 위치는 더욱 굳어지고 있다. 최근 요소수 사태가 대표적인 사례다. 수교 직후 중국은 한국에서 기술, 중간재를 조달하며 상호 호혜적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중국이 반도체, 소재 등 분야에서 한국을 추격하면서 수교 후 30년간 이어진 관계가 바뀌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외교 소식통은 “반도체 등 중국이 한국에 의존하고 있다고 알려진 품목도 중국은 수입선을 다변화하고 기술 추격에 힘쓰고 있다”고 했다.

중국 정부가 개혁·개방 시기 도입했던 외국 기업에 대한 각종 혜택을 축소하는 반면 규제는 강화하면서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불확실성은 커지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최근 중국에 진출한 지 10년 이상 된 기업 512곳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 기업의 85%가 10년 전보다 기업 환경이 악화됐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