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군이 아니라 짐승이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 서북부에 접한 소도시 이르핀의 올렉산드르 마르쿠쉰 시장은 지난 7일(현지 시각) CNN 인터뷰에서 울부짖듯이 말했다. 그는 “러시아군이 우리 도시의 주거용 건물과 구급차에도 무차별 포격을 하고 있다”며 “러시아군은 100% 민간인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전날 피란 가던 가족 3명이 러시아군의 박격포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사실이 사진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키이우로 가는 길목인 검문소 부근에서 캐리어를 끌고 가던 여성과 10세 아들, 8세 딸의 뒤쪽 20여m 지점에 러시아군 포탄이 떨어지며 건물 파편과 흙먼지가 휘몰아쳤다. 뿌연 연기가 걷히자 일가족의 시신이 드러났다. 현장 동영상은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확산됐고, 미 뉴욕타임스는 이례적으로 일가족이 희생된 사진을 1면으로 보도하며 전쟁의 참상을 전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이 장기전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이처럼 러시아군 공격으로 사망하는 우크라이나 민간인이 속출하고 있다. 러시아군은 당초 예상과 달리 우크라이나군이 강력한 저항으로 맞서자 군과 민간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공격하는 잔혹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이날 키이우 서부 빵 공장이 러시아군의 공습을 받고 무너져 30여 명 중 최소 13명이 숨졌다. 제2 도시 하르키우에서는 민간인 거주 지역이 집중 공격을 받아 8명이 숨지고 건물 20여 채가 불에 탔으며, 북부 체르니히우에선 포격으로 학교 건물이 파괴됐다. 중서부 빈니차에서도 순항미사일 공격에 민간인 5명 포함 총 9명이 사망했다. UN 인권고등판무관실(OHCHR)은 “지난 11일 동안 민간인 406명이 숨지고 801명이 다치는 등 사상자가 총 1207명 나왔다”고 말했다.
국제사회는 특히 러시아가 민간인을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인도적 통로’를 무시한 채 공격을 계속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러시아는 지난 3일 우크라이나와 2차 회담을 할 때부터 ‘인도적 통로’에 합의했다고 발표했지만, 이 약속은 번번이 무시당했다. 심지어 외부로 빠져나가려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듯한 공격도 계속하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지난 7일 텔레그램에 올린 동영상에서 “인도주의 통로에 대한 합의가 있었지만 러시아의 탱크, 다연장 로켓포, 지뢰가 그 자리에서 작동했다”며 “러시아 병사들이 민간인이 탈 예정이던 버스를 여러 대 파괴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양측은 7일 열린 세 번째 회담에서 러시아 접경지대인 우크라이나 북동부 수미에서 남쪽으로 150㎞ 정도 떨어진 폴타바까지 인도적 통로 개설에 합의해 8일 오전 이동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교착·갈등 국면이 이어지면서 제대로 운용될지는 의문시되고 있다. 게다가 러시아가 제시한 통로 10개 중 5개가 러시아나 친러 국가인 벨라루스로 가도록 돼 있어. 우크라이나의 반발을 사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러시아의 이런 조치에 대해 “위선적”이라며 비난했다.
영국 BBC와 워싱턴포스트 등 외신들은 러시아의 인도주의 통로 합의와 민간인 공격이 지난 2016년 시리아 내전 당시 구사했던 술책을 재현하려는 것일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당시 러시아는 반군 세력이 장악한 알레포를 포위한 뒤 남아있는 민간인이나 반군들에게 인도적 통로를 제공하겠다고 해놓고도 실제로는 포격을 멈추지 않았다. 알레포 전투에서 어린이 100명을 포함해 민간인 440명이 숨졌다. 이 일로 반군과 민간인의 사기가 크게 떨어져 도시는 함락됐다.
한편 우크라이나군 저항에 부딪혀 러시아군의 진격 속도가 느려지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8일 “러시아가 공격을 계속하고 있지만 병력의 진격 속도는 현저히 느려졌다”고 말했다. 키이우와 체르니히우 등 주요 도시는 여전히 우크라이나 수중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BBC는 “우크라이나군이 남·동·북부 지역에서 방어를 계속하고 있으며, 사기가 떨어진 러시아군은 약탈에 의존하고 있다”고 전했다.
러시아군 전력의 피해도 계속 늘고 있다. 우크라이나군은 지난 7일 “키이우 인근 상공에서 러시아 전투기 2대를 대공미사일로 격추했다”고 밝혔다. 전날에는 하루 동안 러시아 전투기 9대를 격추했다고도 했다. 하르키우 인근에서는 러시아군의 소장급 지휘관이 전투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정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군사 공격이 계속되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연합군 지원을 강화하기 위해 유럽 각지에 병력 500명 및 전투 자산을 추가로 보내기로 했다. 폴란드와 루마니아에 항공 지원 운영 센터, 독일엔 정비 업체 등을 배치할 계획이다. 독일에는 이미 파견한 제1 기갑여단 전투단과 제3 보병사단에 추가 병참 지원을 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