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이 교착 국면으로 빠져든 가운데, 러시아군 고위 관계자가 당초 목표를 바꿔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확보에만 주력하겠다는 방침을 공식 표명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은 예상 외로 고전해온 러시아가 ‘종전 전략’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러시아의 이번 전략 수정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중대 분기점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바이든 폴란드행에 초조한 러, 르비우 폭격 -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앞으로 동부 돈바스 지역에 주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러시아가 2014년 크림반도 병합 이후 사실상 영향력을 행사해 온 돈바스 지역 해방으로 전쟁 목표를 축소, 출구 전략을 모색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26일(현지 시각) 러시아의 공습을 받은 우크라이나 서부 최대 도시 르비우의 일부 지역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는 모습을 현지 주민들이 국기 게양대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 /AFP 연합뉴스

세르게이 루드스코이 러시아군 총참모부 제1부참모장은 지난 25일(현지 시각) 모스크바에서 가진 언론 브리핑에서 “군사작전 1단계의 주요 목표를 대부분 이뤘으며 이제 2단계로 진입한다”고 밝혔다. 그는 “(1단계 군사작전을 통해) 우크라이나군의 전투력이 현저하게 감소됐다”며 “이로 인해 우리는 주된 목표인 돈바스의 해방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앞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비롯한 러시아 당국자들은 지난달 24일 전면 침공을 단행한 직후 ‘우리의 목표는 우크라이나를 무장해제시키고 비(非)나치화시키겠다는 것’이라고 수차례 공언해왔다. 러시아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현 대통령을 축출한 뒤 친러시아 꼭두각시 정권을 수립해 사실상 속국으로 두려고 했다.

25일 러시아군 당국의 발표는 당초 러시아가 내걸었던 목표와 차이가 크다. 더욱이 돈바스 지역의 절반가량은 2014년 3월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이후 우크라이나가 통제권을 상실하고 러시아가 사실상 영향력을 행사해온 곳이다.

이에 대해 주요 외국 매체들은 “위기에 몰린 러시아가 목표와 전략을 수정하고 있다”는 분석을 쏟아냈다. 뉴욕타임스(NYT)는 “좌절한 러시아가 이번 전쟁의 목표를 낮추겠다는 시그널을 보낸 것”이라고 했다. 영국 BBC는 “러시아 부참모장의 발표는 모스크바가 당초 내세웠던 야심찬 계획의 실패를 자인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러시아의 전략 변경은 최근 우크라이나군의 기세가 저항 차원을 넘어 러시아군에 실질적 위협이 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우크라이나 국방부는 26일(현지 시각) “수도 키이우와 남부 지역 등 전역에서 러시아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특히 돈바스 상황과 관련해서 “동부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지역에서 러시아군의 탱크 8대와 11개의 차량을 파괴했다”며 구체적인 수치를 곁들였다.

러시아군의 전반적인 움직임이 둔화되고 있는 정황도 잇따라 포착되고 있다. 미국의소리(VOA) 방송은 주미 영국 대사관 당국자를 인용해 “물류 중심지인 남서부 항구도시 오데사로 진격하는 러시아군 진군 속도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BBC는 “돈바스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러시아군의 진군 속도는 빙하처럼 얼어붙은 상태”라고 했다.

결국 수세에 몰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역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자신들의 ‘뒷마당’ 역할을 해온 돈바스 지역에 대한 확실한 통제권만 확보하는 선에서 목표치를 현실적으로 조정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요 외신들과 군사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러시아가 8년 전 우크라이나로부터 크림반도를 강제병합할 때와 비슷한 방식으로 돈바스 지역을 흡수하려 들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로이터통신은 26일 현지 소식통을 인용해 친러시아 반군이 돈바스 루한스크에 세운 소위 ‘루한스크인민공화국’이 러시아 연방 가입을 위한 주민투표를 추진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는 크림반도 합병 때도 친러세력을 전면에 내세워 주민투표를 강행했었다.

루한스크 친러세력의 주민투표 추진 소식이 알려지자 키릴로 부다노프 우크라이나 국방정보국장은 한반도 분단상황에 빗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남북한처럼 분단시키려 한다”며 반발했다.

러시아는 26일 서부 최대 도시 르비우의 유류저장시설을 공습하는 등 공세를 이어갔지만, 러시아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악재는 잇따라 나오고 있다. 올렉시 아레스토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고문은 25일 러시아 남부군구 제49연합군 사령관인 야코프 랴잔체프(48) 중장을 사살했다고 밝혔다. 개전 이후 7명째 장성 제거다. 러시아군의 하극상 사건 보도까지 나왔다. 영국 일간 더 타임스는 우크라이나 언론을 인용해 파병된 러시아 소총 여단의 여단장인 유리 메드베데프 대령이 탱크에 치여 숨졌는데, 이는 동료의 사망에 분노한 휘하 부대원의 소행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어수선한 분위기의 러시아가 돈바스 지역에 병력을 추가 투입하는 정황도 포착됐다. BBC는 러시아가 최근 10개 전술대대를 돈바스에 투입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향후 러시아는 병력을 돈바스 지역에 집중 투입해 이곳에서 우크라이나의 영향력을 완전히 차단시키는 데 주력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2014년 이래 돈바스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친러 반군 세력 간 교전으로 현재까지 1만4000여 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일부 군사 전문가는 러시아가 기만 전술을 벌일 가능성도 제기했다. 러시아 군사 전문가 파벨 루친은 NYT에 “러시아의 이번 전략 수정은 새로운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속임수를 쓰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