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여성들이 임신 6개월이 되기 전까지는 자유롭게 낙태할 수 있도록 한 연방 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 판결이 49년 만에 뒤집힐 전망이다. 미국 사회의 치열한 정치·이념 대결의 불씨였던 낙태 문제를 두고 여성의 자유로운 선택을 중시하는 진보 진영과 태아의 생명권을 강조하는 보수 진영의 갈등이 격화할 조짐이다.
미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3일(현지 시각) 보수 성향 새뮤얼 앨리토 대법관이 작성한 ‘로 대 웨이드’ 판결 관련 의견서 초안 내용을 입수해 공개했다. 연방대법원이 1973년 1월 7대2로 낙태금지법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린 뒤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전면 무효화하고 낙태 문제를 재논의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성폭행을 이유로 낙태를 요구했던 여성의 가명 ‘로’와 텍사스 주 정부를 대표했던 검사 ‘웨이드’의 이름을 따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초안은 로 대 웨이드 판결에 대해 “처음부터 완전히 잘못됐다. 추론은 예외적으로 약했고 그 결정은 해로운 결과를 낳았다” “낙태 문제의 국가적 해결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논쟁을 불태우고 분열을 심화시켰다”는 말로 강력히 비판했다. 연방대법원은 현재 미시시피주가 제정한 낙태법의 위헌 여부를 심리하고 있다. 공화당이 장악한 주 의회가 2018년 통과시킨 이 법은 긴급 상황이거나 태아에게 심각한 이상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임신 15주 이후의 낙태를 금지하는 내용이다. 이 법에 반발해 미시시피주의 산부인과가 주 정부를 상대로 위헌 소송을 내 1·2심에서 이겼지만, 주 정부가 상고하면서 대법원으로 올라왔다.
‘로 대 웨이드’ 판례가 확립된 뒤 주 당국의 낙태 규정에 대한 위헌 소송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대법원의 진보·보수 이념 구도가 팽팽하게 유지됐기 때문에 번번이 기각됐었다. 그러나 낙태에 대한 강력한 규제에 찬성하던 전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020년 9월 진보 성향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사망한 뒤 보수 성향의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을 임명하면서 이 판결이 뒤집힐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이 인사를 통해 보수 5, 진보 4였던 대법원 이념 지형이 6대3으로 보수 쪽으로 쏠렸기 때문이다. 미시시피주 낙태법 위헌 사건은 대법원이 보수 절대 우위로 재편된 뒤 맞는 첫 번째 낙태법 심리였다. 이 때문에 판례가 깨질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게 점쳐왔다. 그리고 실제 이런 취지로 쓰여진 초안이 통째로 유출된 것이다.
이 초안이 확정될 경우, 보수 성향 지역에서 여성의 낙태를 엄격히 제한하는 내용의 입법이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이미 지난해 9월 임신 6주 이후 낙태를 이유 불문하고 원천적으로 금지한 이른바 ‘심장박동법’을 시행한 텍사스주를 비롯해, 최근 플로리다주와 오클라호마주 등이 강력한 처벌 규정을 동반한 낙태금지법을 속속 도입하고 있다. 이번 사안은 오는 11월 중간 선거의 핵심 이슈로 떠오를 가능성도 커졌다. 초안이 유출된 데 대해 연방대법원은 공식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의 파기 가능성이 알려지면서 워싱턴 DC 연방대법원 앞을 비롯해 뉴욕·로스앤젤레스·시카고 등 주요 대도시에서는 낙태 옹호론자들의 반대 시위가 열렸다. 민주당과 미국의 주요 여성 단체들은 3일에도 주요 도시에서 반대 집회를 열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