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80년대 필리핀을 철권 통치했던 마르코스 집안이 36년 만에 권좌에 복귀할 전망이다. 9일(현지 시각) 치른 필리핀 대선에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64) 후보가 개표율이 53.5%인 상황에서 1754만표를 얻어, 경쟁자인 레니 로브레도 부통령(831만표)을 크게 앞선 것으로 비공식 집계됐다고 현지 언론들이 보도했다. 마르코스 주니어는 “이제 모든 필리핀인이 하나로 단결할 때”라고 소감을 말했다. 소수의 권력자 집안이 쥐락펴락해온 필리핀 특유의 ‘가문 정치’가 위력을 발휘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마르코스 주니어의 아들 산드로 마르코스(28)도 이날 함께 치러진 하원 선거에서 가문의 연고지 일로코스노르테주의 라오아그시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이 유력시되고 있다.
마르코스 가문은 지난 1986년 2월 항쟁(피플 파워)으로 실각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 3년 뒤 망명지 하와이에서 사망하면서 필리핀 정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마르코스를 축출하고 들어선 코라손 아키노 정권의 허가로 귀국한 뒤 일로코스노르테주를 기반으로 빠르게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했다. 3000켤레가 넘는 구두 등 사치와 향락으로 국제적 지탄을 받았던 어머니 이멜다(하원)와 마르코스 주니어(상·하원) 모두 의원을 지냈다.
지난해 마르코스 주니어의 대권 도전이 가시화하면서 민주·진보 진영을 중심으로 “필리핀 역사를 암흑으로 몰아넣었던 독재자 일가에게 권력을 다시 줘선 안 된다”는 반대 운동이 벌어졌다. 이런 공세에 대해 마르코스 주니어 캠프는 맞대응을 피하면서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마르코스 집권기를 고도성장을 이룩하고 사회가 안정된 황금기로 윤색하는 전략을 택했다. 외신들은 이런 전략이 대성공을 거둔 것으로 분석했다. 유권자의 절반이 마르코스 폭정기를 경험하지 못한 30대 이하 젊은 층이었고, 이들이 마르코스 가문을 필리핀의 황금시대를 이룬 유능한 정치 명문가로 인식하면서 열렬히 지지하게 됐다는 것이다.
마르코스 주니어 집권 후 필리핀 외교 노선의 방향도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출범 직후부터 인권 외교를 중시하는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와 사사건건 충돌하면서 대미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됐다. 대신 상대적으로 중국과 밀착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필리핀은 지난달 미국과 대규모 군사 합동 훈련을 개최하는 등 협력을 확대하는 모습이다. 두테르테 정권의 후계자를 자처해온 마르코스 주니어가 당분간 중립적 태도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한편 퍼스트레이디와 의정 경험이 있는 어머니 이멜다가 수렴청정 방식으로 국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