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가 16일 오전(현지 시각) 열차 편으로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방문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과 회담했다. 세 나라는 인구와 경제 규모에서 유럽연합(EU)의 ‘빅3′다. 지난 2월 러시아의 침공 뒤 유럽의 여러 나라 정상과 국제기구 수장이 키이우를 방문했지만, 이 정상들의 방문은 처음이다. 이들과 별도로 클라우스 요하니스 루마니아 대통령도 이날 키이우를 찾았다.
BBC 등 유럽 언론에 따르면 3국 정상은 이날 러시아의 점령으로 큰 피해를 입은 키이우 근교 도시 이르핀을 둘러봤다. 이르핀은 러시아군의 민간인 무차별 학살이 자행된 곳으로 암매장당한 주민들 시신 290여 구가 발견됐다. 정상들은 이어 젤렌스키 대통령과 만나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방안 등을 중점 논의했다.
앞서 숄츠 총리는 키이우역에 도착한 뒤 기자들에게 “단순한 연대 과시에 그치지 않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재정적·인도적 지원뿐 아니라 군사적 지원도 계속할 것”이라며 이번 방문의 핵심 의제가 군사 지원임을 시사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영웅적으로 저항하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위해 유럽이 분명한 정치적 신호를 보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고위 인사들은 최근 서방 국가들을 향해 러시아와의 전력 차를 극복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신속히 지원해 달라고 거듭 요청해왔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 14일 덴마크 언론 화상 인터뷰에서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물적 자원이 더욱 필요하다”고 말했다. 올렉시 레즈니코우 우크라이나 국방장관도 영국 이코노미스트 인터뷰에서 “무기 지원이 지연되는 데 따라 우리가 치러야 할 비용은 바로 우리의 피”라며 “우린 신속한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각국 정상과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회동에서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절차 신속 처리 문제도 중점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EU 지도부는 우크라이나의 신속 가입을 돕기 위해 절차를 최대한 간소화해 후보국 지위를 부여하겠다는 입장이다. EU는 오는 23~24일 27국 정상이 모두 모인 회의에서 우크라이나 후보국 지위 부여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이번 3국 정상의 방문은 최근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우크라이나군이 군사적으로 러시아군에 크게 밀리고 있는 상황에 대해 서유럽 강대국들의 책임론이 불거지는 상황에서 이뤄졌다. 미 자유유럽방송은 “우크라이나는 무기 지원이 늦어지고 있는 것은 이 나라들이 머뭇거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EU 내 영향력이 막강한 독일과 프랑스는 EU 지도부가 공언한 것과 달리 우크라이나의 신속한 EU 가입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이번 방문이 자국 내 여론 악화와 연관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유로뉴스는 “마크롱 대통령과 숄츠 총리는 러시아 침공으로 황폐화된 우크라이나를 한 번도 찾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내에서 강력한 비난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이번 정상회의를 통해 서방의 무기 지원이 신속하게 이뤄지더라도 당장 우크라이나군 전력에 큰 도움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미국의소리(VOA)는 “서방국가들은 우크라이나군에 익숙한 소련제 무기를 집중 지원해왔지만 탄약이 고갈돼 화력이 저하됐다”며 “최신식 서방 무기가 도입돼도 실전 적응 등에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전했다.
한편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전 대통령은 이날 3국 정상의 방문과 관련해 트위터에 “개구리 요리와 소간으로 만든 소시지, 스파게티를 좋아하는 유럽팬들이 키이우 방문을 좋아한다”고 썼다. 그는 “2년 후 우크라이나가 이 지구상에 존재할지 의문이다”라고도 했다.
현재 전황은 우크라이나에 크게 불리하다. 러시아군은 돈바스 지역의 최대 격전지로 꼽히는 세베로도네츠크 대부분을 장악하고, 보급 및 대피에 필요한 다리 세 개를 파괴하는 등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러시아 국방부는 세베로도네츠크 시내 우크라이나군 저항 거점인 아조트 화학공장에 남아있는 우크라이나 병력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고 요구했지만, 우크라이나군은 이를 거부했다. 현재 이곳에는 500여 명의 민간인도 함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세베로도네츠크가 장기 저항에도 불구하고 끝내 러시아 수중에 떨어진 마리우폴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