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발발 이틀 전인 1950년 6월 23일 스탈린의 특별지시가 담긴 극비문서. photo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6·25전쟁 발발 이틀 전, 소련 최고지도자 겸 소련군 최고사령관(대원수) 이오시프 스탈린이 이른바 ‘남조선 작전’에 관한 특별지시를 내린 극비문건이 발견됐다. 1950년 6월 23일, “남조선 작전에 관한 모든 암호 문건을 미트베이 자하로프(당시 대장) 동무의 기구(소련군 총참모부 정찰총국)를 통해 보고하라”는 명령이 담긴 외교문건이다. 스탈린은 ‘필리포프’라는 가명(假名)을 통해 ‘극비’라고 적힌 이 같은 명령서를 북한 주재 초대 소련대사(1948~1951) 테렌티 시트코프에게 하달했다.

시트코프 대사는 소련군 육군 상장(별 셋) 출신으로, 소련군(88독립보병여단) 대위 출신 김일성을 앞세워 사실상 북한을 통치했던 소련 군정의 최고 책임자다. ‘필리포프’라는 이름은 스탈린이 1940년대 후반부터 즐겨 쓴 가명이다. 1950년 6월 23일 스탈린이 하달한 해당 문건에서 ‘전쟁’ ‘공격’과 같은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6·25전쟁 발발 이틀 전 ‘남조선 작전’이라고 언급한 대목에서 ‘6·25전쟁’을 에둘러 표현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지난 2월 우크라이나를 무력침공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역시 우크라이나 공격을 ‘특별군사작전’으로 에둘러 표현한 바 있다.

스탈린, 6·25전쟁 사전 인지 증거

해당 문건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을 불과 이틀 앞둔 시점에 스탈린이 이미 개전시점(6월 25일)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다. 자연히 6·25전쟁이 소련의 승인을 받은 북한 김일성의 계획된 ‘남침(南侵)’이었음을 재차 증명해준다는 평가다. 반면 북한은 6·25전쟁을 ‘조국해방전쟁’으로 부르며 “미제의 사주를 받은 남조선 리승만(이승만) 정부의 ‘북침(北侵)’으로 시작됐다”는 입장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그간 6·25전쟁 발발과 관련해 김일성과 박헌영이 1950년 4월 모스크바를 직접 방문해 스탈린과 만나 개전 허락과 군사지원 등을 요청했음이 1991년 구소련 몰락 후 공개된 다수의 문건을 통해 알려진 바 있다. 하지만 6·25전쟁 발발을 불과 이틀 앞둔 6월 23일, 스탈린이 자신의 ‘가명(필리포프)’을 사용해 6·25전쟁과 관련한 직접 지시를 내린 극비문건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자연히 “6·25전쟁은 북침”이라는 북한의 기존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잃게 됐다.

6·25전쟁 발발 72주년을 앞두고 발견된 이번 문건은 표도르 째르치즈스키(한국명 이휘성) 국민대 책임연구원이 러시아 모스크바의 사회정치사 문서보관소에서 찾아 주간조선에 제공했다. 모스크바 사회정치사 문서보관소는 1952년 소련공산당으로 확대개편되기 이전의 기구인 ‘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등의 모든 중요 자료를 보관하는 곳이다. 2018년 ‘김일성 이전의 북한’이란 책을 펴낸 바 있는 째르치즈스키 연구원은 이 같은 내용 외에 김일성과 스탈린, 6·25전쟁 등에 얽힌 다수의 자료가 포함된 ‘김일성 전기’(한울)라는 책을 최근 출간했다.

째르치즈스키 연구원은 “스탈린은 혹시 적이 문서의 내용을 알게 돼도 진짜 작성자를 파악할 수 없도록 ‘필리포프’라는 가명을 쓴 것으로 보인다”며 “남조선 작전이 극히 중요한 일이었다는 증명”이라고 설명했다. 또 그는 “해당 문서가 작성된 6월 23일과 한국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 사이에 스탈린의 이름 또는 가명(필리포프)이 언급된 문서는 아직 확인한 적이 없다”고도 밝혔다. 6·25전쟁을 앞두고 스탈린의 이름(가명)으로 직접 지시한 가장 최신 명령서라는 뜻이다.

실제로 해당 문건에서 ‘필리포프(스탈린)’는 시트코프에게 “이 같은 사실(남조선 작전)은 귀하(시트코프)만 알아야 하고, 귀하에게 전달할 특별암호를 설치한다”고 언급한다. 대신 “남조선 작전과 관계없는 다른 문건은 기존 암호에 따라 외무부 채널을 통해 진행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문건에서 ‘남조선 작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특별암호를 부여할 정도로 보안에 각별한 신경을 쓴 셈이다. 째르치즈스키 연구원은 “6월 23일에 특별암호를 부과해 별도로 보고받을 정도의 ‘남조선 작전’이 6·25전쟁 말고 또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필리포프’ 가명으로 작전 은폐

문서 좌측 최상단에 ‘극비’라고 적힌 해당 문건은 1950년 당시 소련군 총참모부 부부장 겸 정찰총국장을 맡고 있던 미트베이 자하로프(당시 대장)를 거쳐 당시 제1부수상으로 있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에게 전달됐다. 스탈린의 최측근으로 외무상을 지낸 몰로토프는 2차 세계대전 직전 ‘독·소 불가침조약(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체결한 당사자다. 해당 문건의 우측 상단에는 몰로토프가 친필로 서명한 그의 이니셜이 보인다. 이후 이 문건은 몰로토프를 통해 북한 주재 초대 소련대사로 있던 시트코프에게 전달됐다.

해당 문건으로 ‘남조선 작전’과 관련해 스탈린과 별도 보고체계를 구축한 것으로 확인된 시트코프는 광복 직후부터 6·25전쟁 개전 초까지 사실상 ‘북조선 소련 총독’으로 군림한 인물이다. 당시 북한에서 김일성을 사실상 배후조종하는 자리에 있었고 미·소공동위원회 소련 측 대표, 1948년 북한 정권 수립과 동시에 초대 북한 주재 소련대사를 맡았다. 하지만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정세 오판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강등당한 뒤 1951년 본국으로 소환됐다. 1991년 구소련 몰락 후인 1995년 발견된 ‘시트코프의 일기’는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다.

한편 이번 극비문건 발견으로 스탈린이 북한의 6월 25일 남침을 미리 인지했다는 사실은 추가로 드러났지만, 이후 행적과 관련한 사실 확인은 여전한 과제다. 스탈린은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과 함께 김일성의 6·25전쟁 개전을 직접 승인한 당사자 중 한 명이지만, 왜 소련군의 직접 파병을 거부했는지, 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7일 개최된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에 불참해 유엔군 파병과 관련해 안보리 상임이사국(소련)에 주어진 거부권을 왜 행사하지 않았는지는 6·25전쟁과 관련해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연구원은 “스탈린이 한국전쟁이 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고, 미군을 한반도에 묶어두기 위해 유엔 안보리에 고의로 불참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전세가 악화된 후 스탈린이 자기합리화를 하기 위한 변명의 측면도 있다”며 “6·25전쟁 관련 문건들을 확인하면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군 수뇌부는 개전 직후 미군의 폭격이 시작된 7월부터 전쟁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데 대한 초조함과 긴장감이 이미 극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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