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독일, 미국 등에서 23년간 복무했던 예비역 미 육군 헬기 조종사가 중국에 포섭돼 핵심 군사 기밀 정보를 빼돌리다 덜미를 잡혔다. 피의자가 정보를 넘기는 대가로 중국으로부터 돈을 받을 때 한국 은행 계좌가 활용된 것으로 드러났다고 미 수사당국은 밝혔다. 최근 학계, 군, 시민사회를 가리지 않고 미국인들을 겨냥한 중국측의 전방위적 포섭 사례가 잇따르면서 미 당국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범행에 한국 은행 계좌가 활용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이 사건이 한국으로 불똥이 튈 가능성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미 캘리포니아 남부 연방지검은 중국 측으로부터 돈을 받고 미국 항공기 관련 각종 군사 기밀을 넘기고, 거짓 증언을 한 혐의 등으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는 있는 전 미 육군 헬기 조종사 M이 법정에서 유죄를 인정했다고 지난 23일(현지 시각) 발표했다. M은 1977년부터 2000년까지 23년동안 군에서 복무했으며 한국과 독일에서도 해외 파병 생활을 했다. 그는 전역 뒤에는 군 관련 민간계약사업자로 일했다. 어느 날 그에게 중국인이 연락을 해왔다. 중국의 항공산업에 관해서 자문을 받고 싶다며 동업을 제의했다. M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2017년 3월 홍콩으로 가서 중국 측 인사를 만나서 미국의 각종 항공기 설계와 관련한 정보를 건네기로 합의했다. 그 대가로 7000달러~1만 달러 가량의 돈을 받았다.
당시 그는 이후 몇차례 더 만남을 통해 자신이 만난 사람이 중국 정부 측 인사이며, 건넨 정보가 중국 정부에 의해 군사적 목적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미 검찰은 밝혔다. 하지만 M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항공관련 기밀정보를 수집해서 USB 드라이브에 저장했다. 그해 9월 M은 상하이 공항 환승 시간에 맞춰 중국 측 인사와 만나서 USB를 건넸다. 그리고 나서 M은 중국측으로부터 대가성 돈을 받는 우회 통로로 의붓딸 명의의 한국 계좌를 활용했다. 그는 의붓딸에게는 계좌로 받게 될 돈은 해외에서 컨설팅을 하면서 받은 대가라고 알렸다고 검찰은 전했다. 그리고 한국 은행 계좌로 돈이 들어오면 다시 자신의 미국 내 계좌 여러 곳으로 분산해서 송금하도록 의붓딸에게 일렀다고 한다. 한국 금융 계좌를 미국과 중국간 자금 직거래 사실을 숨기기 위한 세탁 통로로 활용하려 한 것으로 짐작되는 대목이다. 그의 수법은 갈수록 대담해졌다. 그는 2018년 3월 발리로 가서 중국인들과 은밀히 만났다. 그는 이적행위에 대한 대가로 중국측으로부터 수천달러를 받았고, 수신처는 역시 의붓딸이 가진 한국의 은행 계좌였다.
2019년 8월에는 홍콩에서 역시 중국 측 관계자들과 만나 2만2000달러의 돈을 받아 챙긴 다음, 이를 세관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몰래 숨겨서 밀수해왔다. M의 이적행위에 대한 첩보가 접수되면서 그는 수사당국의 용의선상에도 올랐지만, 자신의 범행을 일관되게 부인했다. 그러나 강도높은 수사가 진행되면서 코너에 몰렸던 M은 결국 재판에 넘겨졌으며 범행 일체를 법정에서 자백했다. 그는 당초 소셜미디어를 통해 접근한 중국 측의 포섭에 넘어간 것으로 조사됐다. 수사 당국자들은 한 목소리로 M을 질타했다. 랜디 그로스먼 남부연방지검장은 “피고인은 동료 근로자들이 만든 항공관련 자료들을 빼내서 중국에 팔았다.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미국의 기술과 정보를 훔쳐서 외국에 넘긴 행동은 강도높게 조사해 누구라도 기소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매튜 올센 연방부지검장은 “미국의 경쟁력과 혁신을 강조하는 법치를 파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인내하지 않고 조사하겠다”며 M에 대해 “중국 정부에 유급 고용된 정보원”이라고 질타했다. 연방수사국(FBI)의 앨런 콜러 정보담당 부국장은 “중국은 미국의 기술을 얻어내려 혈안이 돼있으며, 이 사례에서 우리는 미 정부 공직자가 중국 정부의 정보원으로 일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이후 현 조 바이든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중국 간 안보·통상 갈등이 격화되면서 중국으로 기술을 빼돌린 중국인 또는 중국계 미국인이 적발돼 법정에서 중형을 선고받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베테랑 헬기 조종사 출신 예비역 미군이 도널드 트럼프 집권기에 포섭돼 이적행위를 한 이번 사건에서 볼 수 있듯 중국의 기술 탈취 시도는 이어지고 있다. 용의자는 중국 국적자, 중국계 미국인, 중국과 아무런 혈연이 없는 미국인 등 다양하다. 지난 5월에는 미시간에 거주하는 59세 여성 화학자 Y가 미국의 경제·무역 관련 정보를 탈취해 중국 정부에 건네려다 적발돼 테네시주 연방법원에서 징역 14년을 선고받았다. 같은 달 캘리포니아에서는 부부과학자 C와 W가 중국에 있는 백신 연구소로 연구 정보를 빼돌리려다 적발돼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같은 지역에서는 금속 관련 회사 전 최고경영자 S가 국방 관련 중요 물자를 중국으로 밀수출하려다 적발돼 재판에 넘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