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시작된 영국의 새 왕 찰스 3세의 시대를 신임 총리 리즈 트러스는 ‘우리들의 새 캐롤린 시대(our new Carolean age)’라고 명명했다. 그러면서 찰스 3세에 대한 충성(loyal service)을 약속했다. 캐롤린 시대의 ‘캐롤린’은 찰스의 라틴어 어원. 튜더, 스튜어트, 조지안, 빅토리안, 에드워디안, 하우스 오브 윈저 왕조로 이어져 내려오는 영국 역사가 새 시대를 열었다는 맥락이다.
하지만 트러스 총리는 찰스 3세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는 칭송도 잊지 않았다. 또 그녀로 인해 영국이 위대한 국가였다고도 했다. 지난 9월 8일(현지시간) 세상을 뜬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사실 70년을 재위해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군주라는 기록을 세웠다. 또 96세로 가장 장수한 군주이자, 세상의 권력자 중 적이 단 한 명도 없는 유일무이한 군주였다는 평가도 받는다. 특히 트러스 총리는 여왕을 ‘현대 영국의 반석(rock)’이었다고 추억했다. 그러면서 “여왕은 항상 즐거움을 누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면서 그녀가 두 개의 짧은 영상(skit)에 출연한 것을 새삼 상기시켰다.
‘두 개의 영상’이 보여준 여왕의 면모
트러스 총리가 언급한 ‘두 개의 영상’은 여왕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일화다. 이 일화를 소개하기 전 영국 바깥 사람들은 잘 모르는 여왕의 개인적인 면모를 먼저 기려보고자 한다. 세상 사람들은 여왕을 오로지 언론을 통해서만 봐서 그런지 엄숙하고 진지한 사람으로만 안다. 그러나 여왕은 우리가 아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갖고 있다고 친구들과 친지들은 말한다. 그들에 의하면 여왕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쾌활하고 유머러스했다. 여왕은 집안의 첫 자식이자 첫 손주여서 어릴 때부터 온 집안의 사랑을 아주 많이 받고 자랐다. 그래서인지 자신도 사랑이 충만한 인간형으로 성장했다.
측근들은 여왕이 “사랑스럽고 장난기 많고 확신을 가진 아이였다”고 입을 모아 증언한다. 성탄절에는 선물 포장을 뜯어 손님들에게 보여주려고 달려가곤 했다고 기억한다. 심지어 캔터베리 대주교는 할아버지였던 조지 5세 등에 올라탄 어린 여왕이 할아버지를 궁전 바닥을 말처럼 기게 만드는 것을 보고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랐다고 기억했다. 조지 5세에게 엘리자베스는 60살이 다 되어 본 첫 손주여서 귀여워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왕세자인 부모가 왕실 임무를 보러 해외 순방을 가면 엘리자베스는 궁으로 가서 할아버지와 시간을 보냈다. 부모보다 조부모와 더 가까웠던 셈이다. 어릴 적의 사랑스럽고 귀여운 모습 덕분인지 여왕은 줄곧 ‘릴리벳(Lilibet)’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호사가들에 의하면 요즘 유행하는 MBTI 16가지 성격형 분류 중 여왕은 9번형 타입이라고 한다. 잘 순응하고, 낙관적이며, 적응을 잘하고, 분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형이다. 또 여왕은 ISFJ형이라 내성적(introverted), 감성적(sensing), 감정적(feeling), 심사숙고(judging)형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ISFJ형은 보통 친절하고 일을 맡으면 분명하게 해내고 믿을 만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해낸 일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을 세밀하게 신경써서 관리하지는 않는 대범한 유형의 성격이다.
이제 일화를 소개해 보자. 우선 2012년 런던올림픽 개막식 때다. 당시 버킹엄궁으로 검은색의 런던 택시가 들어가면서 영상은 시작된다. 이어 제임스 본드 역의 다니엘 크레이그가 택시에서 나와 궁궐 계단을 가볍게 뛰어 올라가 복도를 걸어 들어간다. 그 뒤를 여왕의 애견인 웰시코기들이 따라간다. 그리고는 시종의 안내로 여왕의 접견실로 들어선다. 그때까지 여왕은 책상에 앉아 뭔가를 쓰고 있다. 제임스 본드가 들어온 걸 아는지 모르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있다. 차렷 자세로 서 있던 제임스 본드는 드디어 참지 못하고 가벼운 기침을 하자 여왕은 뒤를 돌아보면서 “굿 이브닝 미스터 본드”라면서 일어선다. 그리고는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여왕과 본드가 버킹엄궁 뒤 정원에 대기하고 있던 헬리콥터에 같이 탄다. 여왕과 본드를 태운 헬리콥터는 고색창연한 런던 시내 상공을 비행하며 런던탑 앞 타워브리지의 두 첨탑 사이를 지나 올림픽경기장이 있는 동쪽으로 향한다. 이런 광경은 개막식이 열리는 주경기장의 대형 스크린은 물론 전 세계에 방영됐다. 그때만 해도 모두들 실시간 생중계인 줄 알았고 누구도 마지막 순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여왕이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리다?
드디어 헬리콥터는 주경기장 상공에 도달한다. 모두들 헬리콥터가 주경기장에 착륙하면 여왕이 본드와 같이 내려서 손을 흔들면서 주빈석으로 올라갈 줄 알았다. 그러나 기상천외한 드라마가 벌어졌다. 헬리콥터 조종사가 뒷자리의 본드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워 신호를 보내자 본드가 문을 열고 아래 상황을 살핀다. 갑자기 화면은 상공에 선회하는 헬리콥터를 밑에서 비춘다. 그런데 갑자기 분홍 드레스를 입은 여왕이 헬리콥터 문 밖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적으로 세계는 경악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여왕이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려? 다시 화면은 추락하던 여왕이 낙하산을 펼치고 천천히 내려오는 광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모두들 이 영상이 생중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감쪽같이 몰랐다. 필자도 현장에서 여왕(물론 여왕 모습을 한 대역)이 치마를 뒤집어쓰고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장면을 너무 놀라 입을 벌리고 쳐다보았다. 낙하산이 경기장에 도착할 때쯤 007 주제가가 주경기장에 울려 퍼지자 ‘여왕 폐하가 입장하신다’는 안내와 함께 실제 여왕 부부가 등장함으로써 6분15초의 영상은 막을 내렸다.
당시 런던은 올림픽 개막식은 반드시 엄숙하고 거대해야 한다는 통념을 깨버렸다. 영화감독 대니 보일의 개막식에는 이렇게 영국인들의 유머가 그대로 나타나 있다. 특히 제임스 본드와 여왕의 협연은 여왕의 전적인 협조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처음에 이런 아이디어가 작가 프랭크 코트렐 보이스와 제작진 사이에서 떠올랐을 때만 해도 여왕이 직접 출연한다는 것은 감히 생각지도 못했다고 한다. 제작진은 그냥 버킹엄궁에 개막식날 여왕이 어떤 옷을 입을 것인지를 알고자 문의했다. 그러자 여왕의 의상 담당자는 “왜 그런 걸 묻느냐”고 물었고 제작진은 올림픽 개막식에 다니엘 크레이그와 여왕 대역이 출연하는 영상 필름을 촬영하는데 대역이 입을 옷을 준비하려고 한다고 답했다. 그런데 다음날 여왕 의상 담당자가 궁으로 코트렐 보이스와 제작진을 들어오라고 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궁으로 들어간 제작진에게 의상 담당관은 여왕이 대역이 아니라 직접 출연하고 싶어 한다면서 당장 면담을 하라고 했다. 그 뒤로 제작진은 수시로 궁으로 여왕을 만나러 갔고 여왕은 일일이 제작에 관여하면서 직접 출연까지 했다.(헬기 낙하 장면만 대역이다.) 심지어 어떤 헬리콥터가 타워브리지 첨탑 사이와 보도의 사각형 공간을 무사히 지나갈 수 있는지까지 제작진에게 알려주면서 해박한 항공기 지식을 뽐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대사 하나를 반드시 말하겠다고 간청을 해서 결국 단 한 줄짜리 대사인 “굿 이브닝 미스터 본드”를 직접 했다. 다니엘 크레이그도 한마디 하지 않았는데 자신만 유일하게 대사를 쳤다고 여왕은 두고두고 자랑하면서 흐뭇해했다고 한다. 여왕은 가족들은 물론 심지어 남편 필립공에게까지 올림픽 개막식날 자신이 무얼 하는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입을 굳게 다문 채 비밀을 지켰다고 한다.
즉위 70주년 ‘패딩턴 베어와의 대화’
다음 영상은 여왕 개인의 축제이자 영국의 축제였던 2022년 7월의 즉위 70주년 다이아몬드 주빌리 현장이다. 특히 축제 서막이었던 ‘패딩턴 베어와의 대화’가 핵심이다. 이 영상도 2012년 올림픽 영상의 작가 프랭크 코트렐 보이스의 작품이다. 이 영상에는 ‘본드·여왕 퍼포먼스’에서 연기의 재미를 본 여왕의 활약이 더 두드러진다. 영상은 여왕의 시종이 홍차 주전자와 홍차 잔이 담긴 쟁반을 들고 버킹엄궁 방(실제로 버킹엄궁 안의 여왕 접견실에서 촬영되었다. 이 방에서 영국 총리와 여왕의 주간 담화가 행해진다)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시종은 여왕과 영국인들이 사랑하는 인형 캐릭터인 패딩턴 베어가 마주 앉아 있는 티테이블에 주전자와 잔을 놓는다. 패딩턴 베어가 여왕에게 먼저 “아름다운 70주년 기념식을 가지시길 바랍니다”라고 덕담을 하고, 여왕은 패딩턴 베어에게 “차(tea)?”라고 묻는다. 그러자 패딩턴 베어는 다짜고짜 홍차 주전자 꼭지에 입을 대고 목에서 소리가 나도록 마구 들이켠다. 여왕은 조금 당황스럽지만 그러나 귀엽다는 표정으로 말리지 않고 지켜만 본다. 드디어 잘못을 지적하는 시종의 기침 소리와 고갯짓에 뭔가 크게 잘못했음을 안 패딩턴 베어는 “정말 미안합니다”라면서 의자 위에 올라가서 팔을 뻗어 여왕 잔에 홍차를 따른다. 그러나 이미 주전자에서는 차가 몇 방울 안 나온다.
여왕이 “괜찮다(Never mind!)”고 하자 패딩턴 베어는 당황하면서 뒤로 앉으려다가 의자가 밀리면서 몸의 균형을 잃는다. 그 결과 주전자는 패딩턴 베어의 손을 떠나 공중에 뜨고 결국 테이블 위 케이크에 떨어뜨리고 만다. 케이크 크림이 튀어 시종 얼굴이 엉망이 된다. 이를 여왕은 손자 재롱을 보듯 흐뭇하게 쳐다본다. 결국 당황한 패딩턴 베어는 여왕에게 “혹시 마멀레이드 샌드위치를 드시겠습니까?”라면서 모자를 벗어 그 안의 샌드위치를 꺼낸다. 패딩턴 베어는 “저는 만약을 위해서 항상 마멀레이드 샌드위치를 가지고 다닙니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여왕도 자신의 핸드백을 들더니 “나도 여기에 나중을 위해서 마멀레이드 샌드위치를 넣어서 가지고 다니는데?”라고 자랑스럽게 뻐기는 듯한 표정으로 샌드위치를 꺼내 보인다.
이후 버킹엄궁 앞 광장에 모인 수만 명의 영국인들이 유니언잭 국기를 흔들면서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환성을 지르자 여왕과 패딩턴 베어는 함께 찻숟가락을 들고는 찻잔을 두드리면서 영국 록그룹 퀸의 ‘위 윌 록 유(We will rock you)’에 박자를 맞춘다. 이렇게 2분30초의 영상이 끝이 나자 여왕의 즉위 70주년 행사가 시작된다.
찻숟가락으로 장단 맞추던 여왕
사실 여왕이 찻숟가락으로 장단을 맞추는 장면은 다들 그것만은 정말 안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여왕에게 요청하기를 상당히 주저했다고 한다. 그러나 제작진의 걱정은 완전히 기우였다. 여왕은 너무나 즐기면서 촬영을 끝냈다. 여왕은 자신의 증손자와 증손녀가 이 장면을 좋아할지를 무엇보다 걱정했는데 주빌리 개막식 현장에 있던 9살의 증손자 조지 왕자와 7살의 공주 샬롯 둘 다 너무 좋아해서 여왕도 흐뭇해했다는 후문이다.
작가는 패딩턴 베어 영상에서 여왕의 대사가 많았던 이유가 여왕이 패딩턴 베어보다 더 출연료가 쌌기 때문이라는 농담을 했다. 배우를 쓰면 일일이 출연료를 주어야 했는데 여왕은 자원봉사니 출연료를 줄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다. 작가는 “여왕은 기가 막히게 연기를 잘했고 필름에서도 그렇게 보이지 않느냐?”고 반문했고 BBC와의 인터뷰에서도 “정말 놀랍도록 훌륭한 코믹 필름이었고 절묘한 타이밍의 코믹 연기였다”고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영상 아이디어를 버킹엄궁에서 먼저 제시했다는 사실이다. 성품이 서로 비슷한 여왕과 패딩턴 베어가 같이 출연하는 영상을 여왕 즉위 70주년 개막 작품으로 만들면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영국인들은 지나치게 공손하고 바보같이 너그럽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캐릭터를 모두 사랑한다. 그러면서도 패딩턴 베어는 엉뚱하고 유머스럽고 약간은 어리석은 사고뭉치다. 아버지 칫솔로 귀를 후벼 나온 귓밥을 굳이 맛을 보고는 맛에 놀라 씻어 내려고 세제를 들이켜는가 하면, 그 칫솔로 이를 닦는 아버지에게 굳이 말해서 토하게 만드는 식이다. 그런 패딩턴 베어로부터 느껴지는 성품을 여왕도 삶을 통해 보여줬기에 여왕 즉위 70주년 기념식 개막 영상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주제라는 것이었다.
여왕은 패딩턴 베어 영상에서 본드 영상에 비해 대사도 훨씬 많이 했다고 흐뭇해했다고 한다. 쑥스러워하지도 않고 긴장도 하지 않고 거의 NG 없이 연기를 했다는데, 대화 장면에서 실제 패딩턴 베어가 앞에 있지 않았는데도 여왕은 전문 배우처럼 능청스럽게 연기를 잘했다고 한다. 작가는 여왕 사후 BBC와의 인터뷰에서 아나운서가 ‘여왕은 언제나 비밀스럽게 배우의 꿈을 꿨다고 한 말을 들었다’고 하자 “분명히 맞습니다”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그런 여왕의 꿈이 영국 현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의 행사(런던올림픽, 즉위 70주년)을 빛내는 개막 작품 출연으로 이끈 것인지 모른다.
연기로 사로잡은 사랑
하긴 여왕은 13살 때 18살의 필립공에게 첫눈에 반해 연애편지를 쓰고 사관학교 면회까지 가면서 쫓아다녔다. 당시 청년 필립에게 여왕은 그저 소녀에 불과했다. 필립이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임관해서 바다로 임무수행을 나간 뒤에도 여왕은 줄창 편지를 써댔다. 편지 10통이 오면 필립은 마지못해 회답을 한 통 했다. 그것도 공주의 편지에 할 수 없이 예의로 하는 듯한 사무적인 내용의 회답이었다. 그러다가 필립은 1943년 성탄 휴가 때 조지 6세의 배려로 윈저성에 머물다가 17살의 엘리자베스가 ‘알라딘’ 무언극에 출연하는 것을 봤다. 그때 완연히 성숙한 백조로 변한 공주 엘리자베스의 매력에 빠져버리게 된 것이다. 74년을 해로한 둘의 인연을 맺어준 것도 어쩌면 여왕의 연기였는지 모른다. 배우를 해도 성공했을 듯하다는 세평대로 여왕 본인 역시 언젠가 “나는 여왕이 안 되었으면 아마 배우가 되었지 싶다”라는 고백을 할 정도였다.
여왕이 출연한 두 편의 영상은 유튜브에서 ‘제임스 본드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2012 런던올림픽 퍼포먼스’와 ‘폐하! 마멀레이드 샌드위치 드실래요?(Ma’amalade sandwich Your Majesty?)’라고 치면 볼 수 있다. 만일 보지 않았다면 반드시 보시라고 강추한다. 2012년 올림픽이 끝난 후 유고브 여론조사에 의하면 ‘본드·여왕 영상’은 ‘영국인이 TV를 보는 방식을 영원히 바꾼 순간’을 묻는 질문 1위에 올랐다. 5위를 차지한 1969년의 아폴로 우주선의 달 착륙 장면을 제칠 정도로 여왕의 깜짝 출연은 영국인들에게 충격을 줬다. 이와 함께 영국인들이 여왕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만들었다. 지금 여왕이 영면에 든 이후 두 영상을 다시 보는 영국인들이 엄청 늘었다. 두 영상은 여왕을 그리워하는 영국인들이 두고두고 찾아볼 듯하다. 이렇게 여왕의 유머러스한 면은 여왕의 성품을 가장 잘 말해주는 것이며 이런 여왕을 영국인들은 사랑한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겁니다!”
사실 여왕은 이런 영상 말고도 영국의 군주 중 가장 많이 TV에 출연했다. 처음으로 전 세계에 TV 생중계된 1952년 2월 대관식부터 시작해 1957년 영국 군주로서는 처음으로 TV를 통해 영국과 영연방 국민들에게 성탄 인사를 할 만큼 국민들과 스크린을 통해서라도 직접 소통하려고 노력했다. 그 이후 매년 성탄 인사도 TV를 통해 해왔다. 물론 써 준 내용을 읽는 데 불과하지만 영국인들은 여왕의 성탄 인사를 보면서 한 해를 돌아보고 다가오는 새해를 맞았다. 여왕의 성탄 인사를 한 해를 마감하는 행사로 여길 정도였고 여왕도 상당히 연설을 즐겼다고 한다. 무엇보다 여왕의 성탄 인사는 영국인들에게 일상이 변화 없이 계속된다는 안정감을 주곤 했다고 영국인들은 회상한다.
여왕은 왕실 가족의 일상생활을 연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자신의 일상을 대상으로 ‘제3자의 눈으로 보는 기록영화(fly-on-the-wall documentaries)’ 촬영을 1969년 처음 허락한 군주이기도 했다. 이 기록영화는 세계에서 무려 3억5000만명이 시청한 빅히트 프로그램이 됐다. 당시 이 프로그램은 ‘돌직구(Daredevil)’라고 평할 만큼 충격이었던 프로그램이었다.
2020년 4월 여왕은 윈저성에서 TV를 통해 코로나 팬데믹으로 고생하는 영국 국민들에게 비장한 연설을 해 많은 영국인들을 울렸다. 그녀는 연설 마지막에 “우리는 아직도 더 참아내야 할 것들이 있지만 곧 좋은 날이 돌아올 것이라는 데 위안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친구들과 다시 만날 것이고, 우리는 우리들 가족과 다시 만날 것이고, 우리는 다시 만날 겁니다(we will meet again)”라고 말해 전국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여왕이 “우리는 다시 만날 겁니다”라고 했는데 이제 여왕을 다시 만날 수 없다고 영국인들은 한탄한다.
여왕의 마지막 미션
인간은 자신이 세상을 뜰 날을 정할 수 없다지만 여왕은 날짜는 물론 장소까지 자신이 봉직하던 조국의 국익을 위해 정해놓고 떠난 듯하다는 말도 나온다. 우선 13살에 만나 첫눈에 반해 82년을 같이 산 필립공의 장례식(2021년 4월)까지 직접 치른 후 세상을 떠났다. 당시 윈저성 성조지성당에서 검은 상복을 입고 모자를 쓴 채 고개를 숙이고 혼자 앉아 있는 키 162㎝의 미망인 모습에 영국인 모두 울었다. 그리고는 2022년 6월 즉위 70주년 백금 기념일도 국민들과 영연방 국민들의 축복 속에 성공적으로 치렀다.
필립공 사후 급속도로 약해지는 여왕의 모습에 영국인들은 걱정을 하면서 최소 즉위 70주년까지는 버텨서 신민들의 축하를 맘껏 받기를 바랐다. 국민의 염원에 보답이라도 하듯 다행히 여왕은 잘 버텨 주었다. 그러고는 영면 딱 이틀 전 보리스 존슨 총리의 사임과 신임 리즈 트러스 총리까지 맞고 자신의 임무를 끝마쳤다. 그리고는 항상 8·9월 두 달간 휴가를 보내는 스코틀랜드 황무지 안의 밸모럴성에서 영면했다. 덕분에 스코틀랜드 국민들은 에든버러성과 여왕의 스코틀랜드 왕궁인 홀리루드성 사이에 있는 자일스대성당에서 편안하게 조문을 할 수 있었다. 브렉시트 이후 안 그래도 독립 기운이 팽배한 대영제국의 분열을 막는 데 마지막까지 큰 공을 세우고 갔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틀 전만 해도 꿋꿋이 서서 특유의 매력적인 미소로 두 총리를 맞던 여왕이 갑자기 세상을 떴다는 소식에 영국인들은 망연자실했다. 특히 주말이면 런던으로 와서 머물던 윈저성 주변에는 한없이 우는 국민들이 숱하게 몰려들었다. 이제 영국인들은 여왕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못내 그리워할 듯하다. 여왕의 목소리는 상류층 특유의 악센트인 유리를 자른 듯(cut-glass tones·단어를 딱딱 부러지게 분명하게 발음하는 방법) 약간 높으면서도 부드러운 발음(piping, stilted voice)으로 귀를 사로잡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4일간 24시간 개방하는 여왕의 영구가 있는 빈소에는 영국인들이 몰려들고 있다. 한밤중에도 2~3시간씩 줄을 서면서 끝도 없이 조의를 표하고 있다. 영국인들이 벌써부터 여왕을 이렇게 그리워하니 분명 여왕은 세상에 적이 없던 유일한 권력자, 행복했던 군주였음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