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취임 44일 만에 사임을 발표했다. 트러스 총리는 20일(현지 시각)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찰스 3세 국왕에게 사임의 뜻을 밝혔다”며 “선거 공약을 지킬 수 없어 물러난다”고 밝혔다.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20일(현지 시각) 런던 총리 관저에서 자신의 사임을 발표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지난달 6일 취임했던 트러스 총리는 강력한 리더십을 보였던 ‘철의 여인(Iron Lady)’ 마거릿 대처를 ‘롤 모델’로 삼았지만, 대처의 임기(11년 208일)에 전혀 미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최단명 총리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영국 총리가 다시 바뀌게 됨으로써 영국 정계와 경제계가 혼란에 빠질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트러스 총리는 지난달 23일 “감세를 통해 영국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는 담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며 소비와 투자 진작을 위한 전방위적 감세안을 내놓았다가 여기에 발목이 결국 잡혔다. 정책 발표 다음 날 국채 금리가 치솟고, 파운드화 가치가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는 등 ‘금융 대란’이 일어났다. 금융시장의 불안은 주택담보대출 금리 인상으로 이어지며 물가 상승에 허덕이던 서민들의 분노를 폭발하게 했다.

트러스 총리는 지난 14일 감세안을 둘러싼 정부 내 혼선에 책임을 물어 쿼지 콰텡 재무장관을 임명 38일 만에 전격 경질했다. 이어서 제러미 헌트를 후임에 임명하며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다.

하지만 영국 언론 매체들은 ‘좀비’가 된 트러스가 총리직에서 쫓겨나는 것은 시간 문제라며 사임을 기정사실화했다. 헌트 신임 재무장관이 트러스 총리의 경제정책을 대부분 폐기하면서 트러스는 ‘사면초가’에 몰렸다.

트러스가 위태롭게 총리직을 이어가는 동안 영국인들이 보수당에 등을 돌렸다. 지난 17일 여론조사 업체 유고브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77%가 보수당이 이끄는 내각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는 유고브가 같은 질문을 해온 지난 11년 중 가장 높은 수치였다. 또한 응답자의 87%는 트러스 총리가 감세 정책을 뒤집는 등 현 내각이 경제를 잘못 다루고 있으며 보수당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답했다.

트러스 총리는 사임 발표 전날인 19일, 하원에서 개최된 정례 주간 총리 질의응답 자리에서도 총리직을 유지하겠다는 의사를 강력히 표명했었다. 트러스 총리는 야당 측의 사임 요구에 대해 “나는 싸우는 사람이지 그만두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설익은 감세안 발표로) 실수를 한 것에 사과하지만 나는 경제적 안정을 확보할 수 있도록 국익을 위해 행동했다”고 맞서기도 했다. 트러스 총리가 발언할 때 의석에선 야유가 쏟아졌다.

하지만 이날 정치적 동지였던 수엘라 브레이버먼 내무장관이 돌연 사임하면서 트러스 총리는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워졌다. 앞서 ‘파티 게이트’ 등으로 신망을 잃은 보리스 존슨 전 총리도 리시 수낙 전 재무장관이 사표를 던지는 등 내각이 줄줄이 사임하자 총리직에서 물러난 바 있다.

브레이버먼 내무장관은 이날 트러스 총리에게 보낸 서신에서 개인 이메일로 공문서를 보내 규정을 위반했다면서 “책임을 지겠다”며 사퇴의 뜻을 밝혔다. 그는 그러면서도 “현재 정부의 방향이 우려된다”며 트러스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가디언은 브레이버먼 내무장관이 사퇴 이유로 든 규정 위반은 내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로, 자리에서 물러나기 위한 형식적인 핑계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보수당은 다음 주 중 트러스 총리의 후임을 뽑는 절차를 개시할 전망이다. 의원내각제인 영국은 집권당 당수가 총리를 맡는다. 새로운 보수당 당수이자 총리를 뽑는 선거는 이르면 다음 주에 이뤄질 예정이다. 이번에는 보수당 의원들만 투표에 참가하고, 전체 당원 투표는 하지 않는다. 트러스 총리의 후임으로는 수낙 전 재무장관, 벤 월러스 국방장관, 페니 모돈트 원내대표 등이 거론된다. 헌트 신임 재무장관은 출마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