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안보리에서 북한 인권 상황을 점검하고 논의하기 위한 특별 회의인 '아리아 포뮬러'가 17일(현지시각)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다. 사진은 지난 7일 유엔 안보리가 여성 평화 안보 관련 회의를 개최하는 모습. 안보리는 국제법적 구속력이 있는 유엔의 유일한 기구다. /AFP 연합뉴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17일(현지 시각) 북한의 인권 문제를 논의하는 특별 회의를 열어 국제 공론화에 나섰다. 오는 21일엔 제네바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북한인권,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이후 10년의 변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도 개최된다. 국제사회에서는 김정은 정권의 핵·미사일 위협이 계속되면서 북한 주민들에 대한 인권 유린이 더 심각해졌다고 보고, 북한 인권 문제를 중요한 어젠다로 다뤄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안보리는 17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북한 인권 상황에 관한 아리아 포뮬러(Arria Formala) 회의’를 개최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30국 대표가 참여해 발언했다. 이번 회의는 미국과 알바니아가 공동 제안하고 한국과 일본이 공동 후원했다. 아리아 포뮬러는 안보리 공식 회의가 여의치 않을 때 이사국 초청으로 비(非)이사국과 비정부기구까지 참여해 유연하게 논의할 수 있는 비공식 회의체로, 이날 한·미·일과 유럽·호주 등의 유엔 대사, 엘리자베스 새먼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과 탈북 여성, 북한 인권 단체 전문가와 각국 언론 매체가 참여했다.

이들은 수십만 명이 수감된 북 정치범 수용소의 실태와 강제 노역, 반체제 인사 구금과 납치, 탈북자 고문·처형과 성폭력, 그리고 선군(先軍) 정책에 따른 만성적 식량·의약품 부족과 주민 영양실조, 질병 확산 등에 대한 최신 정보를 공유했다. 중국의 탈북자 강제 송환 중단을 촉구하고 북 정권 책임자들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하는 방안도 거론됐다.

지난 2022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사단법인 물망초를 비롯한 북한 인권 단체, 탈북 단체 회원들이 2019년 11월 있었던 탈북 어민 북송 사건과 관련해“살인마 문재인을 고발한다”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이들은‘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에게 드리는 3만 탈북자의 호소문’을 통해 “이 사건은 반인륜적 범죄”라며 “정부가 이에 관한 철저한 조사와 책임자 처벌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합뉴스

유엔의 가장 권위 있는 기구인 안보리가 북한 인권에 관한 특별 회의를 개최한 것은 이례적이다. 통상 안보리에선 특정 국가의 인권 문제는 미얀마나 시리아 같은 분쟁 지역의 안보 문제를 논의할 때 부수적으로 논의될 뿐, 한 회원국의 인권 문제만 따로 떼내 논의하는 경우는 북한이 유일하다. 내전 상태도 아닌데 국가 시스템을 동원해 장기적으로 자국민 인권을 유린하는 정권은 북한 외에 찾아보기 힘들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기에 가능했다.

이와 관련, 미 고위 당국자는 16일 내·외신 콘퍼런스콜을 열고 이번 회의를 개최한 배경에 대해 “북한 정권이 불법적인 대량 살상 무기 개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던 배경엔 주민 강제 노동과 착취가 있었다. 주민들은 극심한 고난에 시달리는데 북 정권은 폭압적 수단을 동원해 무기 개발에 자원을 집중했다”며 “이번 회의는 북 주민의 인권과 존엄을 증진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황준국 유엔대사도 본지에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과 인권 문제는 동전의 양면”이라며 “북한의 군사 도발은 ‘한미 군사훈련에 맞선 대응’이란 논리 등으로 정당화하지만, 주민 상대 인권 탄압은 방어가 쉽지 않다. 북한 인권을 개선하려는 노력 없이는 핵·미사일 문제의 해법을 찾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안보리 관계자는 “(과거사 문제를 해결한) 한일 정상회담을 통한 양국 관계 정상화로 국제사회가 단합해 북 인권 문제를 제기하기 용이한 환경이 됐다”고 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7일 전날(16일) 화성-17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훈련을 단행했다고 밝혔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의 그의 딸 김주애가 참관했다. 유엔 등 국제사회는 "북한의 지역 안정을 저해하는 무력 도발과 안보리 결의 위반을 강력 규탄한다"고 했다. /뉴스1

반면 북한을 편드는 중국과 러시아는 “인권 문제를 다루는 총회 제3위원회에서 다뤄도 될 문제를 굳이 안보리까지 끌어올려 정치 쟁점화하지 말라”고 반대했고, 북한도 “미국의 대북 인권 책동”이라며 반발했다. 이날 회의도 원래는 유엔TV로 생중계될 예정이었으나 중국의 거부로 무산됐다.

이번 아리아 포뮬러 개최는 향후 북한 인권 논의 확대에 동력을 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안보리는 2013년 설립된 COI가 최종보고서를 낸 2014년에 아리아 포뮬러 형식으로 북 인권 회의를 처음 개최했었다. 이를 계기로 북 인권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2014~2017년 안보리 공식 공개회의로 격상됐다. 그러나 2018~2019년 미북·남북 정상회담이 진행될 때 트럼프 미 정부와 문재인 정부가 “북한을 자극할 수 있다”며 인권 의제를 덮어버려 안보리 회의가 아예 무산됐다. 2020~2022년엔 중국과 러시아가 공개 회의에 반대해 비공개 협의에서 ‘기타 안건’으로 다뤄졌다. 유엔 안팎에선 “북 인권이 공개 논의되지 않으면 ‘인권침해를 계속 저질러도 괜찮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끊이지 않았다.

황준국 주유엔 한국 대사가 지난해 10월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북한의 중거리 탄도미사일(IRBM) 발사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서 안보리의 제재 이행을 촉구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안보리에선 최근 3년간 공개 회의가 열리지 못한 북 인권 의제가 자동 폐기될 뻔했으나, 한미의 노력으로 올해 안보리 주요 60개 의제 중 하나로 유지되게 됐다. ‘안보리 북한 인권 의제 지속’을 요청하는 공동 서한엔 2021년 11국이 참여했으나 2022년 32국에 이어 올해 62국으로 급증했다. 이번에 우리 대표부는 각국을 끈질기게 접촉해 기존 서구 국가뿐 아니라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등 각 대륙에서 서명 건수를 대폭 늘리며 치열한 인권 외교전을 벌인 것으로 전해졌다.

☞아리아 포뮬러(Arria Formula)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비공식적 회의체. 1992년 안보리 순회 의장국이었던 베네수엘라의 디에고 아리아 유엔 대사가 당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의 인권 참상을 고발하려는 크로아티아 목사의 보고를 듣고자, 안보리 회의장이 아닌 유엔 라운지 커피숍에서 간담회를 연 것이 시초다. 이후에도 안보리 이사국 간 이견 때문에 공식 회의가 어렵더라도 인권침해 등 여러 현안을 신속하게 논의하는 특별 회의로 종종 활용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