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현지 시각) 미국 델라웨어주 윌밍턴 뉴캐슬 카운티 상급법원에서 폭스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1조원에 달하는 합의금을 받아낸 투·개표기 제조업체 도미니언 보팅 시스템의 최고경영자 존 풀로스(왼쪽 두번째)와 변호인단이 법정을 나오고 있다./로이터 뉴스1

2020년 미국 대선에 대해 개표기 조작 가능성을 수차례 보도했던 폭스사(社)가 투·개표기 제조업체에 1조원에 달하는 돈을 물어주기로 합의했다. 언론·출판의 자유를 규정한 수정헌법 1조를 절대 가치로 여기며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해온 미국에서 언론 보도 관련 재판이 이처럼 거액의 배상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미국 사회에서 가짜 뉴스로 인한 사회적 해악을 퇴치하는 것이 표현의 자유의 보호를 넘어서는 급선무가 됐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워싱턴포스트(WP)는 “투·개표기 제조업체 도미니언 보팅 시스템이 폭스뉴스(폭스가 운영하는 뉴스 채널)가 자사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델라웨어주 법원에 제기한 16억달러의 손해배상 소송에 대해 양측은 폭스가 7억8750만달러(약 1조391억원)를 배상하는 것으로 합의했다”고 18일(현지 시각) 전했다. 이번 배상액은 폭스의 지난해 매출 140억달러의 5%, 현금 보유분(40억달러)의 20%에 달하는 거액이다. 어떤 방식으로 배상액을 지급하더라도 경영상 상당한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미 언론들은 보도했다. WP는 “미 명예훼손 소송에서 공개된 합의금 중 가장 큰 금액”이라고 했다. 폭스뉴스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보수 성향 뉴스 채널이다.

이번 소송은 조 바이든 대통령(민주당)이 공화당 후보였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승리한 2020년 11월 미 대선이 끝난 후 폭스뉴스가 반복적으로 보도한 내용이 불씨가 됐다. 트럼프가 이미 결과에 불복할 것임을 시사하는 가운데 폭스뉴스는 “도미니언이 바이든의 당선을 위해 투표 결과를 조작했을 수 있다”는 내용을 잇달아 내보냈다. 예를 들어 2020년 12월 8일 방송에서 앵커 마리아 바티로모가 “우리는 도미니언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나는 투표에 부정행위가 있었다는 걸 알고 있다”고 하자 패널인 시드니 파월 변호사는 “표를 뒤집거나 존재하지 않는 표를 추가하는 사기가 발생했다”고 응수했다. 앞서 11월 방송에선 트럼프 측 변호인이었던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이 “그들(도미니언)은 선거를 조작하기 위한 회사로 설립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내용은 여과 없이 반복해서 방송됐지만,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었다.

폭스사가 지난 미국 대선 후 반복적으로 방송한 ‘개표기 조작’ 의혹 보도에 대해 소송을 제기한 투·개표기 제조업체 도미니언에 7억8750만달러(약 1조391억원)를 물어주기로 18일 합의했다. 사진은 2020년 11월 ‘네바다 투표소에서 투표 사기가 벌어졌다’고 주장한 인물의 얼굴을 가리고 인터뷰한 폭스뉴스 화면./FOX뉴스 화면캡처

당시 대선에서 전국 50주 중 28주에서 도미니언의 투·개표기를 사용했던 만큼 이 같은 보도 내용은 큰 논란을 불렀다. 패배를 부정하던 트럼프 지지층 사이에서는 ‘부정선거 음모론’이 급속하게 퍼졌다. 대선 불복 기조가 확산하면서 이듬해 1월 트럼프 지지자들이 미 국회의사당에 난입해 사상자가 발생하는 미 민주주의 역사상 초유의 사건으로 번졌다. 결국 부정선거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도미니언은 2021년 3월 폭스의 허위 보도로 자사의 명예가 심각하게 손상돼 큰 금전적 손실을 입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번 소송은 거액의 청구 금액만큼이나 미국 사회 최대의 해악으로 떠오른 ‘가짜 뉴스’와 관련됐고, 미국 사회가 가장 중요한 가치로 꼽아온 ‘표현의 자유’ 문제가 걸려있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모았다.

18일(현지 시각) 미국 델라웨어주(州) 윌밍턴에 위치한 뉴캐슬 카운티 상급법원 앞에서 투·개표기 제조업체 도미니언의 최고경영자(CEO) 존 풀로스(오른쪽)가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피고인 폭스 측은 재판 과정에서 “우리는 잘못한 게 없다. 이 소송은 (표현의 자유를 적시한) 수정헌법 1조에 대한 공격”이라고 줄곧 주장했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선 “그동안 언론 보도 내용을 두고 제기된 각종 소송에서 수정헌법에 명시된 표현의 자유의 중요성을 적시하며 피고에게 유리하게 판결해준 판례가 많다는 걸 감안한 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그러나 재판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재판의 쟁점은 “폭스뉴스가 보도 내용이 허위라는 것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방송했느냐”의 여부로 좁혀졌고, 원고 측은 이 같은 정황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를 제시하며 공세를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지난달 재판에서 담당 에릭 데이비스 판사가 “도미니언의 개표 조작 가능성을 주장한 폭스뉴스의 보도가 허위라는 것은 수정처럼 명확하다”며 가짜 뉴스의 문제점을 적시한 듯한 발언을 하면서 도미니언의 승소 가능성이 점쳐졌다. 폭스는 이에 재판을 지속하기보다는 거액의 배상금을 물고 합의로 마무리하는 쪽을 선택했다.

이날 합의 사실이 공개된 뒤 도미니언 측 저스틴 닐슨 변호사는 “진실이 중요하고 거짓말에는 대가가 따른다”며 “이번 합의는 진실과 민주주의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나타낸다”고 했다. 폭스 측은 성명에서 “도미니언에 대한 특정 주장이 거짓이라고 판단한 법원의 판결을 인정한다”는 입장을 냈다. 다만 합의에 따르면 폭스뉴스는 정정 보도나 사과 방송을 할 의무는 없다. 이번 사건은 해당 합의를 판사가 최종 수용하면 종료된다.

2020년 대선을 전후로 미국은 개표 조작설을 비롯해 각종 가짜 뉴스로 큰 혼란을 겪었다. 이번 재판 결과를 계기로 악의를 갖고 퍼뜨리는 가짜 뉴스의 폐해는 표현의 자유와 분리해서 대응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WP는 “일부 수정헌법 1조 옹호론자들도 폭스뉴스의 행위가 전통적으로 보호돼온 표현의 자유의 범위를 넘어섰다고 주장하며 이번 합의를 반기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