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 전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게 성폭행당했다며 민사소송을 낸 칼럼니스트 진 캐럴(가운데)이 8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남부연방지방법원을 떠나고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뉴욕 법원 배심원단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27년 전 성범죄 사건에 대해 배상 책임을 묻기로 한 평결을 내리자 이토록 오래된 사건에 대한 소송을 어떻게 제기할 수 있었는지 의문을 갖는 이들이 많다. 이런 민사 소송이 가능해진 계기는 지난해 뉴욕주가 시행한 ‘성인 생존자법(Adult Survivors Act)’이다. ‘생존자’란 범죄를 당하고 그 충격과 고통을 극복한 피해자를 뜻하는 말이다.

이 법은 성범죄 피해 당시 만 18세 이상 성인이었던 이들을 대상으로 소멸시효(민사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기한)가 만료된 사건이라도 1년간 민사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했다. 지난해 11월 24일 발효돼 올해 11월 24일까지 효력을 갖는다. 이전까지 뉴욕주에서 성인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범죄의 소멸시효가 최대 20년이었다. 새 법안을 통과시킨 뉴욕 주의회는 “수치심과 두려움으로 피해 사실을 비밀로 품어온 생존자들을 돕기 위한 목적”이라고 했다.

이번에 배상 평결을 받은 진 캐럴(79)은 ‘성인 생존자법’을 통해 승소한 대표적인 사례가 됐다. 캐럴은 지난 2019년 출간한 책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1996년 성폭행을 당했다는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지만, 이미 소멸시효가 지난 시점이었기 때문에 제소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지난해 ‘성인 생존자법’이 도입되자 시행 첫날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민사소송을 제기했고, 이번에 법정에서 성추행 사실이 인정되면서 피해 보상금 200만달러(약 26억5000만원)와 성추행에 대한 징벌적 배상액 28만달러(약 3억7000만원) 등 배상금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이 밖에도 ‘성인 생존자법’ 발효 이후 뉴욕에서는 과거 유명인에게 피해를 입었다며 소송을 제기하는 여성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법이 시행되고 나흘 후인 지난해 11월 28일, 미국 굴지의 음반사인 애틀랜틱 레코즈에서 1984년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일했던 얀 로에그가 회사 설립자인 아흐메트 에르테군(1923~2006)에게 수차례 성폭행을 당했다며 회사와 유가족을 고소했다. 또 지난 3월에는 한인 여성 진 김씨가 2001년 스콧 스트링어 전 뉴욕시 감사원장의 선거 캠프에서 인턴으로 일할 당시 스트링어가 성추행을 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최근 몇 년 새 미국에서는 성폭력 범죄의 시효를 연장하거나 아예 폐지하는 주(州)가 늘고 있다. 버몬트·메인주는 각각 지난 2019·2021년 성폭력 범죄에 대한 시효를 완전히 폐지했다. 캘리포니아주는 성폭력 범죄의 기존 시효 10년을 일시 해제하고, 2009년 1월 1일 이후 일어난 성폭력에 대해서는 올해 1월 1일부터 2026년 1월 1일까지 3년간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시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