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달러화가 국제 이슈로 부각하면서 비달러 무역의 중심에 서 있는 위안화가 주목받고 있다./뉴시스

올 들어 국제사회에서 ‘탈달러(Dedollarisation)’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지난 4월엔 구글의 주요 검색어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고 한다.

탈달러가 국제 이슈로 부상한 가장 큰 요인은 역시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서방 진영이 러시아를 달러 중심의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에서 퇴출시키자 러시아를 중심으로 비달러 국제 교역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비달러 무역의 중심에 서 있는 나라는 세계 2위 경제 대국인 중국이다. 공개적으로 러시아 편에 선 중국은 중·러 무역에서 위안화 비중을 대폭 끌어올리는 성과를 거뒀다. 위안화는 러시아 중앙은행인 러시아은행의 비축통화에도 포함됐다. 지난 2월에는 모스크바 외환거래소 거래액 순위에서 사상 처음으로 달러를 제치고 거래액 1위 외화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탈달러’ 정치 공세

여기에 좌파 정권이 집권하는 중남미 국가들도 탈달러 행보에 가세하는 분위기이다. 지난 4월 중국을 방문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은 중국과 SWIFT 대신 중국국제결제시스템(CIPS)을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룰라 대통령은 상하이 현지 연설에서 “왜 전 세계 모든 국가가 달러로 거래를 해야 하느냐? 왜 위안화는 국제 화폐가 될 수 없나”라며 탈달러를 주장하고 나섰다. 브라질은 중국의 남미 지역 최대 무역국으로 작년 무역액은 1715억달러에 이른다. 브라질은 철광석, 대두 등을 주로 중국에 수출하고 기계류와 통신장비, 가전제품, 철강재 등을 수입한다.

중국과 통화 스와프 협정을 체결하고 있는 남미의 아르헨티나도 지난 4월부터 기업의 위안화 무역 대금 결제를 허용했다.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지난 5월 23일 자국 방송에 나와 “미국이 달러 기축통화 시스템을 중국과 러시아, 베네수엘라, 쿠바 등에 대한 제재에 이용하고 있다”며 “베네수엘라는 탈달러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했다.

이 밖에 방글라데시가 지난 4월 러시아에 3억1800만달러에 달하는 원자력발전소 건설대금을 위안화로 지불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지난 3월에는 중국해양석유총공사(CNOOC)가 프랑스 토탈에너지로부터 아랍에미리트산 액화천연가스(LNG) 6만5000t을 매입하면서 위안화를 결제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미국 정부에서도 이런 상황에 대한 우려가 나왔다. 재닛 옐런 미 재무부 장관은 지난 4월 중순 CNN에 나와 “달러의 역할과 관련이 있는 금융제재를 가하게 되면 제재를 받는 당사국이 다른 대안을 모색하면서 달러의 주도적 지위가 위협받을 수 있다”고 했다.

국제 금융시장에서도 달러가 흔들리는 조짐이 보였다. 세계 각국 중앙은행들은 작년 하반기부터 달러 자산을 줄이고 금을 사들여 달러의 위상에 문제가 생긴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됐다. 작년 세계 각국 중앙은행이 사들인 금은 총 1136t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고, 올해 1분기에도 228t을 매입했다고 한다. 국제통화기금이 지난 3월 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작년 4분기 기준 세계 중앙은행 외환보유액 중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58.36%를 기록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1995년 이후 가장 낮은 수치”라고 보도했다.

미국 국채의 최대 보유국으로 꼽히는 일본과 중국이 지난 1년간 국채 보유 규모를 3600억달러어치나 줄인 것도 달러의 위상을 흔들었다.

이런 전반적인 상황을 보면 당장이라도 달러 패권에 큰 균열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으며, 위안화가 달러를 대신해 기축통화로 올라서는 건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게 대다수 국제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위안화, 결제통화 순위 5위에 불과

중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이용해 위안화 결제 비중을 대폭 끌어올리는 등 짭짤한 재미를 보긴 했지만, 전체 결제 통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높지 않다. SWIFT 집계를 보면 올 4월 기준 위안화의 국제 결제 비중은 2.29%로 세계 5위를 차지했다. 2021년 4월(1.95%)에 비하면 크게 늘었지만 미국 달러(42.71%), 유로(31.74%)에 비해서는 미미한 수준이다. 영국 파운드(6.58%), 일본 엔(3.51%)에도 크게 뒤진다.

중국이 국제사회 제재를 받은 러시아와 자국에 우호적인 중남미 국가 등을 동원해 탈달러 선전 공세에 나섰지만, 실제 국제 무역 시장에 미친 영향은 제한적임을 알 수 있다.

중국은 지난 수년간 미국 달러 패권의 중요한 한 축인 ‘페트로 달러’를 흔들기 위해 공을 들여왔다. 중동산 원유·천연가스 거래에 위안화를 끼워넣으려고 한 것이다. 시진핑 주석은 작년 12월 초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 중국·아랍정상회의에서 “중동산 원유와 천연가스 수입을 대폭 늘릴 계획”이라면서 “위안화 원유 결제를 추진하겠다”고 발언했다. 하지만 시 주석의 이런 제안은 중동 국가들에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정상회의 직후 나온 공동성명에는 위안화 원유 결제에 관한 내용이 한 줄도 없었다.

사우디 정부 소식통은 당시 로이터통신에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타니 알 제유디 아랍에미리트 대외무역국무장관은 “아랍에미리트는 무역결제에 다른 통화를 사용하는 방안을 논의할 준비가 돼있지만 그 영역은 석유 외 분야에만 해당한다”고 했다.

중동 산유국 ‘페트로 위안’ 거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등 중동의 석유 수출국 중 상당수는 자국 통화를 달러 가치와 연동하는 달러 페그제(peg system)를 택하고 있고, 석유를 팔아 번 돈을 대부분 미국 국채 형태로 보유하고 있다. 이런 나라들이 달러의 지위를 흔들 수 있는 ‘페트로 위안’을 택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사우디아라비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중동 산유국이 위안화 사용에 대해 아예 관심이 없다”고 보도했다.

위안화가 최근 무역 통화로서 비중을 넓혀가곤 있지만 국제 결제 통화로서는 적잖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무역통화로서 각국의 수용 정도도 떨어지고 환금성도 미국 달러나 유로, 파운드에 비해 낮다. 또 국가가 환율 결정에 직접 개입하는 등 환율 결정 시스템도 투명하지 않다는 지적을 받는다.

중국은 제조업 대국이긴 하지만 금융산업 분야는 아직 크게 낙후돼 있다. 국제결제통화로서 금리나 환율, 주가 등 시세 변동에 따른 위험에 대비할 수 있는 다양한 파생상품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홍콩 영자지 아시아타임스의 지난 4월 20일 자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은행은 4월 초 발표한 보고서에서 “위안화는 무역 상대방의 수용도가 낮고 환율도 안정돼 있지 않아 러시아 수출입업자들이 통화 리스크에 노출돼 있다”면서 “위험을 헤지할 수 있는 충분한 파생상품이 없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4월 중국을 방문한 룰라 브라질 대통령(왼쪽)이 시진핑 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룰라 대통령은 중국에서 “왜 위안화는 국제 화폐가 될 수 없나”라며 탈달러를 주장하고 나섰다./뉴시스

러시아도 보유 위안화 처분

이에 따라 러시아은행은 연초부터 위안화를 계속 처분하고 있으며, 4월 10일에도 3억2000만위안(약 4660만달러)을 서방 통화와 교환했다고 이 매체는 보도했다. 드리트리 툴린 러시아 중앙은행 제1부총재는 기자회견에서 “위안화가 모스크바 외환거래소의 최대 거래 외화이고, 중국은 러시아의 가장 큰 무역 상대국이지만 중국 중앙은행은 위안화가 대거 해외에 유통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서 “러시아 기업과 개인들이 위안화 현금을 충분히 보유하도록 허용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위안화가 무역결제통화를 넘어 미국 달러 같은 기축통화로 가는 길은 더 멀다. 기축통화가 되려면 어느 화폐로든 필요할 때 손쉽게 교환할 수 있는 환금성을 갖춰야 한다. 환율도 지금처럼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시장 논리에 따라 결정될 수 있어야 한다. 환율, 금리 등의 변동에 따른 손실 위험을 대비하기 위한 다양한 파생금융상품을 개발하고 이런 상품이 유통될 수 있는 시장도 형성돼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위안화가 기축통화가 되려면 중국이 장기간 엄청난 규모의 무역적자를 감수해야 한다는 점이다. 위안화가 전 세계 곳곳에 풀려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1976년 이후 50년 가까이 무역적자를 내면서 엄청난 달러를 전 세계 각국으로 내보냈다.

“미국 같은 장기 무역적자 불가능”

자오젠(趙建) 시징(西京)연구원 원장은 중국 언론 기고문에서 “패권 화폐가 되려면 엄청난 비용을 투입하고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면서 “전 세계에 충분한 통화를 공급하려면 갈수록 엄청난 국제수지적자를 보게 되는 ‘트리핀 딜레마(Triffin Dilemma)’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썼다. 트리핀 딜레마는 브레튼우즈체제하에서 기축통화국인 미국이 직면했던 난제이다. 국제 거래 결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무역적자를 통해 기축통화인 달러 공급을 계속 늘리면 그만큼 달러 가치가 떨어져 기축통화로서 국제 신용도가 위태로워지는 진퇴양난의 상황을 의미한다.

수출은 소비, 투자와 함께 중국 경제 성장의 3대 축으로 꼽힌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수십 년간 무역적자를 내면서 위안화를 해외에 내보낸다는 건 중국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과제라는 것이다.

중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일시적인 상황을 이용해 러시아, 브라질 등 자원 대국과 위안화 결제를 늘리고 있지만 사실상 물물교환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석유와 천연가스, 철광석, 대두 등을 중국에 수출하고 그 대가로 중국산 공산품을 수입하는 것으로 위안화가 결제 통화로서 큰 의미를 발휘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중국 경제 당국도 이런 상황을 모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7개월 연속으로 미국 국채 보유 규모를 줄였지만, 올 3월에는 다시 205억달러를 늘렸다. 이로써 중국의 미 국채 보유액은 8693억달러가 됐다.

지난 5월 17일에는 달러 대비 위안화 환율이 1달러에 7위안 이상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위안화 가치가 그만큼 떨어진 것이다. ‘1달러=7위안’이 깨진 것은 작년 12월 이후 6개월 만이다. 제로코로나 해제 이후에도 더딘 경기 회복이 주요인이었다. 위안화 국제화보다 경제 활력 회복이 더 급한 상황인 것이다. 대만 자유시보는 “위안화가 달러를 대신한다는 건 백일몽”이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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