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미국의 핵무기와 군사적 긴급 사태에 대비한 비상 계획(contingency plan) 등을 담은 기밀문서를 퇴임 후 대거 반출해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리조트 사저에 보관한 것으로 드러났다. 트럼프는 지난 8일 미 전직 대통령 중 처음으로 연방 검찰에 기소됐는데, 9일 공소장이 공개되면서 그가 유출한 기밀문서 범위와 규모가 밝혀졌다.
이날 잭 스미스 연방 특별 검사의 공소장에 따르면 외국의 핵 능력, 군사적 공격에 대한 미국과 동맹국들의 잠재적 취약성, 외국의 공격에 대비한 보복 계획 등을 담은 일급 기밀(Top Secret)문서들이 서류 상자에 담겨 마러라고 리조트 내 연회장, 사무실, 창고, 화장실, 가족 침실 등에 쌓여 있었다. 연회장이나 창고 등은 외부 인사도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는 장소였다.
스미스 특검은 공소장에서 “이런 문서들이 승인 없이 유출되면 미국의 국가 안보, 대외 관계, 미군의 안전, 인적 자원과 민감한 정보 수집 지속 방법 등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연방수사국(FBI)의 수사가 개시된 후에도 트럼프 전 대통령이 측근에게 상자를 숨기라고 지시하는 등 기밀문서를 반환하지 않고 은폐하려 했다는 증거를 49쪽에 이르는 공소장에 세세히 담았다.
공소장에 따르면 트럼프는 퇴임 직후 마러라고 리조트 내 연회장인 ‘화이트 앤드 골드 볼룸’에 서류 상자를 쌓아뒀다가 이후 비즈니스 센터와 창고, 가족실 등으로 옮겼다. 공소장에는 연회장과 창고, 심지어 화장실에 짐짝처럼 쌓인 기밀문서 상자들이 찍힌 사진이 첨부됐다.
스미스 특검은 화장실 변기 바로 옆에 천장까지 닿을 높이로 서류 상자가 쌓여 있는 사진, 창고에 쌓여 있던 상자가 넘어지는 바람에 바닥에 흩어진 것으로 보이는 ‘기밀(Secret)’ 표기 문서 사진 등을 확보해 공개했다. 창고 바닥에 흩어진 기밀문서는 외국 군사력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어, 파이브 아이스(미국·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5국이 참여하는 기밀 동맹체)와만 공유하도록 한 보안 문서다.
기밀문서를 이리저리 옮기다 일어난 일의 정황도 공소장에 담겼다. 한 직원은 창고 바닥에 널브러진 상자 사진을 다른 직원에게 휴대전화 메시지로 보내면서 “문을 열었더니 이 상태네”라고 썼다. 문자 수신자는 “이런 이런(Oh no oh no), 미안해. 대통령이 내 휴대폰을 가지고 있었네”라고 답했다. 트럼프가 문자를 봤다는 뜻으로, 검찰은 이 사진을 트럼프가 기밀문서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수 있다는 증거로 첨부했다.
트럼프는 그동안 기밀문서 불법 반출 혐의를 부인해 왔다. 재임 기간 직권으로 기밀을 해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특검 측은 2021년 7월 뉴저지주 베드민스터의 트럼프 내셔널 골프 클럽에서 한 작가와 한 인터뷰 녹음을 반박 증거로 제시했다. 당시 트럼프는 한 국가에 대한 미 국방부의 공격 계획을 이 작가에게 보여준 뒤 “대통령이었을 때는 내가 기밀을 해제할 수도 있었을 텐데 지금은 할 수가 없다. 이것은 여전히 기밀”이라고 말했다.
이런 증거를 토대로 스미스 특검은 총 7가지 죄목에 혐의 37건으로 트럼프를 기소했다. 이 가운데 31건은 간첩법(Espionage Act)상 ‘국방 정보 고의 보유’ 혐의다. 한 건당 최고 징역 10년, 벌금 25만달러(약 3억2000만원) 등 처벌이 가능한 중범죄다. 이 외에도 트럼프에게는 사법 방해 공모 혐의 1건, 연방 수사를 피해 서류를 은닉한 혐의 1건, 서류나 기록을 부정하게 은폐한 혐의 1건, 서류 미제출 혐의 1건, 은폐 계획 혐의 1건, 거짓 진술 혐의 1건도 적용됐다.
특검이 제기한 모든 혐의를 재판부가 받아들일 경우, 트럼프에게 징역 최고 400년, 벌금 900만달러(약 116억4000만원)를 선고할 수 있다고 뉴욕포스트는 보도했다.
내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 1위 대선 주자인 트럼프가 다시 국군 통수권자이자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을 맡을 수 있느냐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축적된 증거가 상당해서 법무부는 기소할 수밖에 없었다. 트럼프에게 다시는 국가 기밀을 믿고 맡겨서는 안 된다”고 했다. 다만 미국에는 기소되거나 실형이 선고된 사람의 대통령 선거 출마나 취임을 막는 법이 없다. 10일 조지아주에서 기소 후 첫 연설에 나선 트럼프는 “터무니없고 근거 없는 기소”가 이뤄졌다며 이번 기소가 “최악의 마녀사냥”이라고 비난했다.
트럼프는 앞서 지난 3월 말 성 추문을 막으려고 성인물 배우 스토미 대니얼스에게 지불한 ‘입막음 돈’을 ‘법률 자문료’로 허위 기재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당시 기소는 뉴욕 맨해튼 지방검찰이 주도해, 연방법 위반 혐의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