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비오 돌라레스(Cambio Dólares·달러 환전)!”
26일(현지 시각)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 중심부의 플로리다 거리. 폭 5m 남짓한 보행자 전용도로 양옆에 늘어선 환전상들이 “달러를 바꾸세요”라고 외치며 외국인들을 상대로 한 호객행위에 열을 올렸다. 이 거리 1㎞ 구간을 걷는 동안 환전상 74명이 달라붙어 흥정을 시도했다. 그중 가장 후하게 부른 환전상과 달러를 바꾸기로 했다. 그는 건물 안쪽 지하 깊숙한 곳의 ‘쿠에바(Cueva·동굴)’라 불리는 사설 환전소로 안내했다. 유리 창구의 작은 틈으로 여직원에게 달러를 건네고 아르헨티나 페소를 받았다. 휴대전화로 환전소 내부를 찍으려고 하자 다른 직원이 제지했다. 이유를 물으니 “정부에서 금지하는 환율로 거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들과 거래한 가격은 1달러당 492페소. 공식 환율이 아닌 ‘블루 달러’라고 부르는 일종의 암시장 환율을 적용한다. 이날 달러당 265페소인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의 공식 환율의 두 배가량이었다. 달러 값을 곱절로 쳐준다는 뜻이다. 아르헨티나에서 ‘블루 달러’ 거래는 불법이다. 하지만 이날 찾은 환전 거리의 경찰들은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현지 주요 언론사 홈페이지나 금융 관련 사이트엔 매일 ‘암시장 환율’이 버젓이 게재된다.
이처럼 아르헨티나에서 공식 환율의 두 배 이상인 암시장 환율이 통용되는 이유는 아르헨티나 페소가 시장에 너무 많이 뿌려졌기 때문이다. 2019년 집권한 대통령 알베르토 페르난데스는 인기 유지를 위해 ‘퍼주기’에 가까운 수준으로 복지와 보조금을 무분별하게 늘렸다.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정권이었던 후안 페론 전 대통령의 ‘페로니즘’을 계승한 것이다. 중앙은행은 정부 방침에 순응해 ‘돈 찍기’로 재정 적자를 메웠다. 그 결과 아르헨티나는 지난 1분기까지 50분기 연속 재정 적자를 기록 중이고,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14%까지 치솟았다.
아르헨티나 국민조차도 자고 나면 가치가 급락하는 페소를 신뢰하지 않아 달러를 보유하고 싶어 하지만, 외환 위기를 겪는 정부는 개인의 달러 환전을 매달 200달러로 제한하고 있다. 이 때문에 현지 숙박 업소나 식당 등을 외국인이 찾으면 직원들이 “페소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암시장 환율로 달러를 바꿔줄 수 있습니다”라며 ‘즉석 환전상’으로 변신해 접근하는 일이 잦다. 이처럼 아르헨티나인들이 달러 확보에 혈안이 된 상태에 지난해 전 세계적인 ‘킹달러(달러 강세)’ 현상이 발생하자 암시장 환율은 더 급등했다. 2019년 초 달러당 40페소 내외였던 공식 환율은 4년 사이 약 6.6배로 올랐는데(달러 가치 상승), 암시장 환율은 12배 넘게 오르며 차이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
페소 가치가 계속 하락하면서 달러를 비롯해 변동성이 비교적 크지 않은 외화를 들고 아르헨티나에 입국하는 외국인 주재원과 관광객들의 삶은 오히려 윤택해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물가가 지난 한 해 100% 남짓 치솟았지만, 암시장 환율이 140%가량 올라 물가 상승분을 상쇄한 것이다. 유튜브에는 ‘달러로 왕처럼 살 수 있는 아르헨티나’ ‘외국인에게 아르헨티나는 얼마나 저렴할까’ 등의 영상이 수십건 올라와 있다. 반면 페소로 봉급을 받는 아르헨티나인들은 인플레이션의 직격탄을 맞아 갈수록 생활이 피폐해지고 있다. 아르헨티나 저소득층을 위한답시고 펼쳐온 ‘퍼주기’ 정책이 국민의 삶은 오히려 어렵게 만들고, 외국인에게 득이 되는 경제의 왜곡이 일어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