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잊지 말아요~(나를 잊지 말아요 by 전영록) 나 떠난 지금도~”

연기파 배우 김희애가 만능 아이돌 스타로 인기를 누리던 1980년대 불렀던 히트곡 ‘나를 잊지 말아요’의 첫 소절이다. 요즘 이 노래가 딱 어울리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임기가 만료돼 후임에게 권좌를 넘겨준 각국 정상들이다. 전(前) 대통령·총리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국내 정치와 국제 정치 무대에서 활동하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독불장군식 리더십이나 강력한 카리스마스로 족적을 남긴 ‘전직 스트롱맨’들이 우선 두드러진다. 지난해 퇴임한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전 대통령은 17일 베이징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과 만났다. 두테르테는 재임 기간 친중국 노선을 고수했고, 미국과 적지 않은 파열음을 냈었다.

17일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회담하고 있다. 두테르테는 재임 기간 친중 노선을 추구하겨 미국 등과 마찰을 빚었다. /신화 연합뉴스

시진핑이 두테르테와 국빈관에서 나란히 앉아 회담하는 모습이 연출됐고, 중국의 외교 1인자 왕이 공산당 중앙 정치국 위원 겸 외사판공실 주임이 배석했다. 시진핑은 “필리핀 대통령 재임 기간 인민과 역사에 대한 책임있는 태도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전략적 선택을 했고, 이로 인해 중국과 필리핀 간 관계는 정상 궤도로 돌아가 발전했고 양국 우호교류에 기여했다”고 했다. 시진핑이 두테르테에게 이런 격식을 갖춘 응대를 함으로써 현재 안보 분야에서 미국과 밀착하고 있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 정권을 견제하려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두테르테는 임기 마지막까지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지만, 단임 규정에 걸려 재선에 도전하지 못했다. 대신 그의 정치적 후계자인 딸 사라 두테르테 카르피오가 부통령이 됐다.

힘있는 전직 국가지도자로 단연 첫손에 드는 사람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다. 그는 그로버 클리블랜드(1837~1908)에 이어 미 역사상 두번째로 한 텀을 쉬고 다시 대통령이 되는 ‘징검다리 대선’에 도전한다. 그의 정치적 앞날의 명암을 보여주는 소식이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온다. 우선 공화당 차기 대선후보로 다른 후보들을 멀찍이 따돌리고 절대 독주를 이어가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에게 상당한 표차로 밀려있는 론 드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는 최근 캠프 스태프를 대거 해고하는 등 적지 않은 내홍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가 피고인으로 법정에 서야 할 형사 재판의 건수도 차곡차곡 늘어났다. 앞서 성추문 입막음 과정에서의 장부 조작 사건과, 퇴임 후 국가 기밀 불법 유출 사건으로 각각 뉴욕주 검찰과 연방 특검에 의해 기소된 그는, 2021년 1월 지지자들의 의회 난입 사태 선동(연방 특검) 혐의로 추가 기소가 확실시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나 4월 13일 뉴욕의 트럼프 타워에 도착해 지지자들을 향해서 손을 흔들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또 대선 직후 조지아주 총무장관에게 자신의 표를 더 찾아내라고 압박한 혐의에 대해서도 주 지방검찰의 기소가 유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기에 최근에는 미시간주에서 가짜 선거인단 명부를 조작해서 대선 투표 결과를 뒤집으려 한 혐의로 미시간 주 공화당전국위원회 소속 16명이 집단 기소되는 새로운 사건이 터졌다. 그러나 이런 사법처리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출마를 제한하는 규정이 없기 때문에 트럼프의 쾌속질주는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트럼프는 자신을 향해 칼끝을 겨눈 잭 스미스 연방 특별검사를 “바이든 법무부의 정신나간 검사”라고 칭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위원회 부위원장이 18일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타스 연합뉴스

이들 못지 않게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왕년의 1인자’가 있다. 실은 ‘왕년의 1인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2인자’의 이미지로 더 각인돼있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전 러시아 대통령이자 현 러시아 국가안보위원회 부위원장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보리스 옐친·블라디미르 푸틴 등 카리스마 짱짱한 지도자들에 비해 존재감은 크지 않지만, 그도 2008년 3월부터 4년동안 러시아 대통령을 지내며 국제 외교무대를 누볐다. 하지만, 그의 대통령 등극은 푸틴의 장기 집권과 연동돼있기도 했다. 2000년 집권한 푸틴은 당시 법 규정으로 3연임이 불가능했다. 이에 따라 후계자였던 메드베데프가 대통령에 있는 동안 그는 총리로 메드베데프를 ‘보좌’했다. 푸틴이 당시 ‘상황 총리’ ‘실세 총리’로 불린 이유다. 2012년 퇴임 후 다시 총리로 돌아온 그는 8년 뒤 퇴임하고 국가안보위원회 부위원장이 됐다.

그리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 오랜만에 사건의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는 서방을 겨냥한 핵협박성 발언을 전담하는 스피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달초 텔레그램에서 “1945년 미국인들의 핵무기로 히로시마·나가사키 폭격 때와 같은 일을 한다면, 모든 전쟁, 심지어 세계 대전도 빨리 끝날 수 있다”고 해 일본 정부의 반발을 불렀다. .그가 ‘핵무기’를 언급하며 엄포를 놓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핵 보유국들은 그들의 운명이 달린 전쟁에서 결코 패한 적이 없다” “(우크라이나로부터 합병한) 영토 방어를 위해 전략핵무기(전술핵무기와 대비되는 파괴적 대량살상무기)를 포함한 모든 무기가 사용될 수 있다” “제3차 세계 대전이 임박했으며 핵무기 대결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 등의 발언을 잇따라 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반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국면에서 메드베데프와는 결이 다른 모습으로 주목받는 전직 국가지도자도 있는데 최근 임기가 연장된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무총장이다. 세계 최대 안보·군사 기구를 이끌고 있으니 당연히 그가 무장(武將) 출신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가 노르웨이 총리 출신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난 12일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열린 나토정상회의 회의장에서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오른쪽)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노르웨이 오슬로 출신인 그는 언론사와 노르웨이 통계청에서 일하다가 1993년 총선에서 당선됐다. 이후 산업에너지부 장관, 재무부 장관 등을 맡아 중앙정계에서 승승장구한 뒤 2005년부터 2013년까지 노르웨이 총리를 맡았다. 정당간 이합집산으로 정권교체가 잦은 유럽 입헌군주국에서 이례적으로 장수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유럽의 마당발이 된 그는 총리 퇴임 뒤 유엔 기후변화 특사를 거쳐 2014년 북대서양이사회의 지명을 받아 나토 사무총장 임기를 시작해 지금에 이른다. 한 차례 연임해 임기를 채우고 퇴임 예정이었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전대 미문의 사건으로 임기가 1년 연장된데 이어 최근에 다시 1년 연장이 확정됐다.

지난 8일 도쿄에서 열린 아베 신조 총리 1주기 기념식에서 부인 아키에 여사가 연단에 올라 발언하고 있다. /AP 교도 연합뉴스

사후에도 국제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경우로는 이달 초 피격 사망 1주기를 맞은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다. 아베 전 총리의 부인 아키에 여사는 17일부터 3박 4일 일정으로 대만을 방문했다. 자민당 의원 두 명이 수행한 이번 방문에서 그는 차이잉원 총통과 환담하고, 내년 총통 선거에 출마하는 라이칭더 부총통 주최 만찬에 참석했다. 또 신베이시에 있는 리덩후이 총통 묘소와 가오슝의 한 사찰에 세워진 남편 아베 총리의 동상을 찾아 추모했다. 사실상 정상 방문 때와 다름없는 일정이었다. 대만 외교부는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세계적으로 존중받는 정치리더로서 일생을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힘썼고, 대만을 지지한다는 발언을 국제회의에서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표명한 바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