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회의가 열렸다. 상임이사국 러시아가 서방국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에 항의하고자 소집했다. 그러나 회의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일부 국가가 북한 무기 구입 가능성이 제기된 러시아를 역으로 성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대표가 러시아를 겨냥해 “안보리 결의는 모든 유엔 회원국이 북한에서 무기나 군수 물자를 조달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포문을 열자 알바니아 대표도 “러시아는 북한과 이란에서 필사적으로 무기를 찾고 있다”고 거들었다. 러시아 대표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지루한 공방이 이어졌다. 회의는 아무런 결론 없이 끝났다. 한때 세계 안보의 마지막 보루로 여겨졌던 안보리가 힘을 제대로 못 쓰는 ‘종이호랑이’로 추락한 지금의 현실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19일 78차 유엔 총회 개막을 앞두고 현 안보리 체제의 존립 가능성에 대한 회의가 전에 없이 커질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구축돼 그동안 크게 변한 국제 정세를 반영하지 못하는 안보리 체제를 수술할 때가 됐다는 목소리도 커진다. 존 커비 백악관 전략소통조정관은 17일 텔레그래프 인터뷰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유엔 회원국에 지금의 안보리 구조를 따져보자는 말을 꺼낼 것”이라고 말했다.
안보리는 구속력 있는 결정이 가능한, 유엔 내 최고 권위 기관이다. 상임이사 5국(러시아·미국·영국·중국·프랑스)과 2년 임기 비상임이사 10국으로 구성된다. 상임이사 5국을 포함 9국 이상의 동의로 채택되는 ‘결의’는 지구촌 안보의 안전판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상임이사국 간 진영 갈등이 심해지고, 세계 평화보다는 자국 이득을 챙기는 행보가 노골화하면서 안보리 내 분열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안보리의 결정은 이사국 간 ‘합의’로 이뤄지기 때문에 미·중 갈등, 러시아의 회원국(우크라이나) 침공 등 갈등 요인이 발생하면 시스템이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지난해 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안보리가 ‘개점휴업’ 위험에 빠졌음을 드러내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국제 질서 수립이나 분쟁 조정 등 민감한 이슈에 한목소리를 내지 못해 합의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난달 30일엔 인권 탄압을 일삼아온 서아프리카 말리 군부 정권에 대한 제재 연장 결의안이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됐다. 러시아는 용병 집단 바그너그룹을 통해 말리 군부 세력을 지원해왔다고 알려졌다.
지난 7월엔 시리아 내전 지역 주민들에게 해마다 유엔 긴급 구호물자를 전달하는 결의안이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됐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고립된 러시아가 중동의 맹방 시리아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 지원을 강화하기 위해 어깃장을 놓았다는 분석이다. 앞서 5월엔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발에 맞춰 미국이 제출한 추가 대북 제재안에 대해 안보리 이사 15국 중 13국이 찬성 의사를 밝혔으나 중국·러시아가 반대해 채택이 무산됐다.
앞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는 안보리의 무력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침공 직후인 2022년 2월 25일 제출된 러시아 규탄 결의안, 7개월 뒤 상정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영토 강제 침탈 규탄 결의안이 모두 침략 당사국이자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물거품이 됐다. 이후 안보리에서 우크라이나 관련 논의는 공전을 거듭하고 있다.
문제는 안보리의 기능 상실이 더욱 두드러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특히 지난 13일 북한 김정은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안보리 분열을 더 부채질할 요인이란 평가가 나온다. 전망대로 북한이 러시아에 무기를 제공하고 러시아가 북한에 핵 관련 기술을 지원할 경우 러시아가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결의에 참석한 핵실험 관련 대북 제재를 스스로 해제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한 외교 소식통은 “상임이사국 내 극심한 분열과 대립 속에서 안보리의 고유 권한으로 작동했던 ‘국가 주권을 초월하는 강행적 관여’가 각지에서 한계에 부닥치고 있는데, 이런 상황이 더 심해질 가능성까지 있다”고 했다. 남승현 국립외교원 부교수는 “안보리 내에서 의견이 쪼개져 합의가 안 되고 있고, 합의가 되지 않으니 어떠한 조치도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안보리의 무력화는 인권·환경 등 그동안 인류 보편적 문제로 여겨온 사안들에 대한 합의조차 어렵게 할 위험이 있다. 이 때문에 상임이사 5국에 모든 힘이 집중된 현 체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특히 상임이사국 진출을 노리는 일본·인도·독일·브라질 등을 중심으로 상임이사국 의석 수 확대 주장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상임이사국의 거부권을 대폭 축소하거나, 안보리의 권한 상당 부분을 총회로 넘기는 방안 등도 거론된다.
미국도 현 체제 개편에 나설 뜻을 밝혔다.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지난 15일 기자 간담회에서 “유엔, 특히 안보리의 존재 가치와 목적이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미국의 생각은 굳세다”며 개편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를 실행하려면 상임이사국의 비준을 거쳐 헌장을 개정해야 하는 만큼 실현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이상현 세종연구소장은 “미국과 중·러가 지금처럼 반목하는 상황에서 주요 핵심 문제에 대한 합의는 당분간은 기대하기 굉장히 어렵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