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최고의 스포츠 이벤트’(영국 옵저버), ‘세계에서 가장 강렬한 스포츠 이벤트’ (영국 더선), ‘세계 최고의 축구 더비’(영국 축구전문지 포포투),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축구 더비’(영국 미러).
‘축구 종가’ 영국의 매체들이 전 세계 수많은 축구 경기를 제쳐 두고 가장 치열한 라이벌전으로 꼽은 아르헨티나의 양대 명문 보카 주니어스와 리버 플레이트의 경기. 이른바 ‘수페르클라시코(Superclásico del fútbol Argentino)’라 불리는 두 팀의 라이벌전이 지난 1일 오후 2시(현지 시각) 보카 주니어스의 홈구장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라 봄보네라(La Bombonera)에서 열렸다.
안방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뛰는 유럽 챔피언스리그와 유럽 주요 리그를 볼 수 있는 시대지만, 그럼에도 유수 매체들이 여전히 수페르클라시코를 최고의 라이벌 매치로 꼽는 것은 오랜 역사와 함께 도시를 넘어 국가 전체가 관심을 가질 정도로 몰입감 넘치는 경기가 펼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1901년 창단한 리버 플레이트는 아르헨티나 1부리그 우승 38회, 남미 최강 클럽을 가리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4회 우승 등 우승 트로피 총 70개를 손에 넣었다. 1905년 창단한 보카 주니어스는 1부리그 35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6회 등 총 74회의 우승 경험을 갖고 있으며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를 배출했다. 이처럼 양 팀은 아르헨티나 축구를 양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페르클라시코를 앞두고는 전국적인 주목을 받으며 매체들이 앞다퉈 구단의 일거수일투족을 다룬다. 아르헨티나 프로축구 취재는 매 경기마다 별도의 취재 신청과 허가를 받는데, 수페르클라시코의 취재 경쟁은 유독 치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날 축제의 열기는 경기장에서 5~10km 떨어진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에서부터 느낄 수 있었다. 경기 시작을 2시간가량 앞둔 정오 무렵부터 이미 보카와 리버 유니폼을 입은 팬들을 쉽사리 찾아볼 수 있었다.
도심에서 경기장이 있는 보카 지역으로 향하는 93번 버스에는 보카 유니폼을 입은 팬 30여 명이 탑승했다. 이들이 승차하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버스 안에서 보카 응원가를 부르기 시작했고 버스 창문을 악기 삼아 두드렸다. 경기장으로 가는 30분 내내 응원 버스를 방불케 했다.
보카 팬들은 유니폼을 입지 않은 일반 승객에게 어느 팀을 응원하는지 물었다. 한 중년 승객이 “리버”라고 답하자 단체로 야유를 보냈다. 마찬가지로 유니폼을 입지 않은 기자에게는 “가시나스(Gallinas·닭들)”냐고 물었다. 그 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들은 “미쇼나리오스(Millonarios·백만장자들)”냐고 재차 물었다. 얼떨결에 “보카”라고 답하니 그제야 “친구(amigo)”라며 환호했다.
‘가시나스’와 ‘미쇼나리오스’는 리버 플레이트를 부르는 별칭이다. 이는 양 팀의 역사와 관련돼 있다. 양 팀 모두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라 보카를 연고로 시작했지만, 1923년 리버가 부촌인 누녜스로 연고를 옮기면서 백만장자라는 별칭이 붙었고 이후 겁쟁이를 의미하는 닭이란 멸칭도 생겼다. 반면 리버 팬들은 여전히 가난한 지역에 연고를 둔 보카 팬들을 푸에르코스(Puercos·돼지들)라고 부른다. 현재는 아르헨티나 국민 70%가 양팀 팬인 것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빈부에 상관없이 남녀노소에 가장 인기 있는 팀이기 때문에 별칭의 의미가 무색해졌다.
이 같은 양 팀의 역사적인 첫 경기는 1913년 리버가 2대1로 승리하면서 시작됐다. 110년간 각종 대회에서 총 260차례 맞붙어 리버 91승, 보카 86승, 무승부 83회로 전적에서도 라이벌임을 여실히 입증하고 있다.
이날 경기가 보카 홈구장에서 열린 만큼 경기장 주변으로 갈수록 점차 보카의 파란·노란색 조합의 유니폼을 입은 팬들이 많아졌다. 경기장에서 1km 떨어진 공원 파르케레사마에서는 응원단 주도 아래 수백명이 모여 응원을 하고 있었고, 경기장 주변 인파로 버스 통행 속도가 영향을 받았다.
이날 경기는 1부리그 28개팀이 참가하는 리그컵 7라운드 경기로 리버는 경기 전까지 A조 4위, 보카는 B조 9위를 달리고 있었다. 보카의 경우 이 경기 직후 브라질 파우메이라스와 남미판 챔피언스리그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4강전을 치르기 때문에 다른 때보다 중요성이 덜할 수도 있지만, 숙명의 라이벌전인 만큼 경기장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경기는 5만여 석을 가득 메운 홈팬들의 일방적인 응원 속에 진행됐다. 경기 시작 전 리버 선수들이 몸을 풀기 위해 경기장에 등장하자 옆 사람의 말소리가 안 들릴 정도의 휘파람 야유를 쏟아낸 반면 보카 선수들에겐 환호성을 터뜨렸다.
축구 경기에서 일반적으로 원정 응원단 좌석을 소규모나마 마련하지만 수페르클라시코에는 원정팬이 입장할 수 없다.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라이벌전으로 꼽히는 만큼 지난 수십 년간 양 팀 팬들 사이의 유혈 충돌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단 관계자는 “충돌을 막고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원정팬 참석을 금지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이날 한 리버 팬이 몰래 경기장에 잠입했다가 발각되며 보카 팬들에게 구타를 당해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실려나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평상복 차림이었지만 팔에 새긴 리버 플레이트 문신을 미처 가리지 못한 탓이었다.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듯 심판이 경기 시작 휘슬을 불기 전 경기장에는 요란한 폭죽 소리와 함께 꽃가루가 흩날렸다. 경기 시작부터 한쪽 스탠드를 가득 채운 보카 응원단이 90분 내내 잠시도 끊기지 않고 열성적인 응원을 주도했다.
경기 중 다수의 팬들이 자유롭게 흡연하고, 심판 판정과 상대팀의 거친 플레이에 언성을 높이며 욕설을 난무하는 마초적 분위기였다. 건설한 지 80년이 넘는 오래된 경기장에서 5만여 관중이 자리에서 뛰는 응원을 할 때는 바닥이 흔들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90분 내내 나름의 질서가 유지됐다.
경기는 전반 41분 리버의 살로몬 론돈이 득점에 성공하며 리버가 앞서갔다. 라이벌전 답게 양 팀이 서로 거친 플레이를 주고 받으며 홈팬들이 민감히 반응했지만, 심판이 웬만해서는 개입하지 않고 경기를 그대로 진행시켰다.
보카의 패색이 짙어지던 후반 27분, 이번 시즌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발렌시아에서 이적해온 우루과이 출신 슈퍼스타 에딘손 카바니가 골망을 흔들며 홈팬들을 열광케 했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오프사이드 판정을 받아 득점이 취소돼 아쉬움을 삼켰다.
이후 보카는 공세를 퍼부었지만, 후반 추가시간 엔소 디아스가 쐐기골을 넣으면서 원정 경기에서 리버가 2대0 승리를 거뒀다. 보카 원정에서 5년 만에 거둔 승리였다.
특이한 점은 상대팀이 골을 넣거나 자신의 팀이 졌을 때 야유를 보내거나 일시적으로 조용해지기 마련이지만, 보카 팬들은 실점해서 패배한 팀의 분위기가 맞나 싶은 착각이 들게 할 정도로 오히려 응원 소리를 높였다. 24년째 보카 팬이라는 아드리안 로페스는 “상대팀의 축하 분위기를 방해하고 팀에 기를 불어넣으려는 특유의 응원 문화”라고 설명했다.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더비매치로 과거 폭력사태가 빈번했던 만큼 5년 만에 홈에서 진 보카의 팬들이 경기 후 난동을 부리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귀가길은 여느 평범한 경기와 마찬가지로 평화로웠다.
특히 경기장 인근에 빈민가가 있어 우범지대로도 알려져 있으나, 경기가 있는 날에는 경찰 수백명이 배치돼 가족 단위의 관람객들도 안전히 다녀갈 수 있는 정도였다. 경기 이후 별다른 난동이나 폭력사태, 범죄 등은 없었고 경기 종료 후 1시간이 지나자 인파가 모두 사라져 일대가 고요해졌다.
경기 후 시내로 돌아오니 경기장에 가지 못해 펍 등에서 경기를 지켜보다 승리를 만끽하러 나온 리버 유니폼을 입은 팬들이 보였고 삼삼오오 모여 응원가를 부르기도 했고, 보카 팬들도 펍에 모여 회포를 풀었다. 홈팬만 있던 경기장과 달리 도심에서 양팀의 팬들이 한 눈에 들어오니 비로소 수페르클라시코가 도시 전체의 축제라는 것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