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장애인 인권 운동가 스테이시 박 밀번(오른쪽)이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하던 시절 친구였던 안드레아 라반트와 함께하던 모습. 그는 코로나 대유행 후 소외 계층을 위한 필수 의료 장비와 생활용품을 전달하는 활동을 하다 서른세 살이 되는 생일날 세상을 떠났다. /KQED 홈페이지

2025년 미국에서 새로 발행되는 25센트(약 340원) 동전에 한국계 여성 장애인 인권 운동가인 스테이시 박 밀번(1987~2020)의 얼굴이 새겨진다. 미국 화폐에 한국계 인물이 등장하는 첫 사례다. 쿼터라고 불리는 이 동전은 지폐와 동전을 통틀어 미국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화폐로 꼽힌다.

미국 연방조폐국은 새롭게 발행되는 쿼터에 얼굴을 장식할 다섯 명을 최근 공개했다. 미국 근현대사에서 남다른 성취를 이뤄낸 여성 20명을 선정한 뒤, 새로 발행하는 쿼터 뒷면에 얼굴을 새기는 ‘아메리칸 위민 쿼터스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이 프로그램은 ‘성별에 따른 차별을 금지한 수정헌법 제19조’ 발효 100주년을 기념해 2020년 시작된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에 따라 2022년부터 2025년까지 쿼터 앞면에는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얼굴이, 뒷면에는 이 프로그램으로 선정된 여성 인물들의 얼굴이 각각 새겨진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1884~1962), 미국 최초의 여성 우주 비행사 샐리 라이드(1951~2012), 시인 겸 배우 마이아 앤절로(1928~2014), 흑인 여성 비행사 베시 콜먼(1892~1926) 등의 얼굴을 새긴 쿼터가 이미 발행됐거나 발행을 앞두고 있다. 이런 가운데 밀번도 쟁쟁한 인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2025년 미국에서 새로 발행되는 25센트 동전에 한국계 여성 장애인 인권 운동가인 스테이시 박 밀번의 얼굴이 새겨진 모습.

밀번은 1987년 서울에서 주한 미군 아버지(백인)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근육 퇴행성 질환인 선천성 근이영양증을 앓는 중증 지체장애인이었다. 부모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로 이주한 그는 “너는 다른 아이와 다르지 않다”는 부모의 신신당부를 들으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초등학교 4학년 때 낙상 사고를 겪은 것을 계기로 자신의 몸이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점을 본격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런 그의 자의식은 그를 인권 운동가로 성장시키는 씨앗이 됐다. 그는 그런 문제의식을 글로 풀어갔다. 지체장애인으로 사회 곳곳에서 겪는 불편함과 부당함, 그리고 사회가 어떤 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등 생각을 담은 진솔한 개인 블로그 글이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청소년 장애인 인권 운동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스무 살이던 2007년 공립 고교 교육과정에 장애인 역사를 포함시키는 노스캐롤라이나 주정부의 개편 과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메서디스트 대학을 졸업하고 스물네 살에 미국 진보·시민운동의 요람인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이후 자신보다 더 형편이 좋지 않은 유색 인종·저소득층·노숙자들을 위한 권리 증진 운동에 뛰어들었다. 진보와 다양성의 가치를 추구했던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는 밀번을 지적장애인을 위한 대통령위원회 위원으로 지명하고, 그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2020년 1월 코로나 사태가 터지자 그는 장애인과 저소득층, 노숙자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마스크와 긴급 의약품·위생용품을 전달하는 데 앞장섰다. 이미 신장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던 그는 수술 후유증으로 같은 해 5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이날은 그의 33세 생일이었다. 밀번의 얼굴과 조지 워싱턴의 얼굴이 양면에 새겨진 쿼터는 내후년에야 볼 수 있지만, 미 조폐국은 이미 그가 휠체어에 앉아서 밝은 표정으로 말하거나 당차게 이야기하는 모습 등을 담은 도안을 공개했다.

한편 밀번과 같이 2025년 발행분 쿼터에 얼굴이 새겨질 여성으로는 흑인 언론인 아이다 웰스(1862~1931), 걸스카우트 창립자 줄리엣 고든 로(1860~1927), 천문학자 베라 루빈(1928~2016), 흑인 테니스 선수 앨시어 깁슨(1927~2003) 등이 선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