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방식으로 재료를 구하고 손질해 요리한 ‘할랄 푸드’는 최근 한류열풍에 힘입어 국내 식품업체들에게는 가장 유망한 수출시장으로 떠올랐다. 내년부터는 K푸드의 할랄 시장 개척에 더욱 속도가 붙게 됐다. 인도네시아가 한국 음식을 수입하면서 이슬람 율법에 맞게 가공됐는지를 살피는 인증절차를 내년부터 한국에서 진행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재단법인 한국이슬람교는 18일(현지시각)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엑스포 호텔에서 인도네시아 정부 할랄보장청(BPJPH)와 이 같은 내용으로 상호인정협정을 체결했다. 세계 4위의 인구 대국(2억7753만명)으로 전국민의 87%가 이슬람교 신자인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의 할랄 시장이다. 지난 9월 윤석열 대통령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조코 위도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할랄 푸드 분야에서 양국이 협력하기로 양해각서를 체결한 뒤 나온 후속조치다.

김동억 재단법인 한국 이슬람교 이사장이 용산구 한남동 이슬람 성원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정지섭 기자

이번 협정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협상의 틀을 다지고 정상회담 테이블 의제로 올리며 동분서주한 실무 총괄자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무슬림 1호 외교관’이었던 김동억(76) 한국이슬람교 이사장이다. 2007년 수단 주재 대사를 끝으로 은퇴했다 10여 년 만에 다시 외교현장으로 돌아온 그는 본지와 만나 “많은 분들이 함께 고생을 했고, 나는 그저 마지막 빗질만 한 것”이라며 “외교관 시절 쌓은 경험을 살려 나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 거 같아 뿌듯하다”고 말했다. 2018년 3월 한국 거주 25만 무슬림(한국인 3만5000명 포함)을 대표하는 이슬람교 이사장으로 취임한 그는 두 가지 생각을 했다고 했다. “이슬람에 대한 국내의 곱지 않은 시선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와 “공직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어떻게 하면 국익에 보탬이 될 수 있을까”였다.

그가 주목한 것은 ‘할랄 푸드’였다. 이슬람세가 강한 중동·동남아시아 내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 라면·과자·건강식품 등의 수요가 급증하고 있었다. 할랄은 식음료 뿐 아니라 의약품과 화장품 등에도 적용돼 무슬림의 의식주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국내 식품 업체들이 잇따라 할랄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깐깐한 현지 심사 규정을 충족시키지 못해 수출이 차질을 빚는 경우가 속출했다. 심사 권한만 국내에서 위탁 받더라도 수출 절차를 획기적으로 간편화시킬 수 있는 사안이었다. 그가 선제적으로 주목한 곳이 세계 최대의 무슬림 소비 시장인 인도네시아였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 한국 대사관에 근무하던 시절 우리 기업들의 대형 프로젝트 수주 협상을 여러 차례 물밑에서 지원했어요. 그 때 경험으로 깨달은게 있어요. 중동·이슬람권은 맥을 잘 짚어야 합니다. 잘 된 줄 알았는데, 결과적으로 남의 다리 긁는 경우가 있거든요.(웃음)”

김동억 한국 이슬람교 이사장(왼쪽)과 무함마드 아킬 이르함 인도네시아 할랄보장청장이 18일 자카르타에서 양국 할랄 보장협정을 체결했다. /한국 이슬람교

2019년부터 서울과 자카르타를 여러 차례 오갔다. ‘인샬라(신의 뜻대로)’를 외치며 상호인정협정체결에 소극적이던 담당자에게 달라붙다시피해서 “한국은 비록 국내 무슬림은 소수이지만, 할랄산업이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고, 이슬람권의 훌륭한 무역 파트너”라고 설득했다. 자카르타의 한국 외교관과도 만나 “정부가 힘을 실어줘야 우리 식품업체들의 시장 개척이 탄력을 받는다”며 정부 차원의 지원을 요청했다. 협상 전권을 쥔 할랄보장청장을 직접 서울로 초청했다. 이런 노력들이 조금씩 성과를 거두면서 정부의 관심도 커졌다. 윤 대통령의 인도네시아 방문 때 발표될 양국 핵심 협력 분야로 ‘할랄’이 공식 포함됐다. 김 이사장은 “인도네시아는 매력적인 시장일 뿐 아니라, 한국에 대한 선호도가 굉장히 높고 무한한 자원부국으로 이번 협정으로 양국의 경제 협력이 보다 긴밀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억 이사장은 스무살 대학생이던 1967년 성경공부의 연장선상에서 이슬람 경전 ‘꾸란’을 접해 독학을 했고, 국내 거주 이집트 학자의 도움을 받아 무슬림이 됐다. 한국이 이슬람권을 접하게 된 본격적 계기인 중동 건설붐도 일기 전이었던 시절이다. 1976년 서울 한남동에 이슬람 성원이 들어서자 그 해 10월 이곳에서 결혼식을 열리고 ‘1호 한국 무슬림 부부’가 됐다. 사우디아라비아 국가 장학생으로 선발돼 킹 사우드 대학에서 유학하고 있던 중 1981년에 외교부에 들어오면서 ‘1호 무슬림 외교관’이 됐다. 사우디·이라크·모로코·이집트·쿠웨이트 대사관에서 근무하면서 이란·이라크전, 걸프전, 2차 이라크전, 9·11 테러 등 격동의 사건들을 중동 현장에서 지켜봤다. “아랍어를 구사하는 한국인 외교관이 무슬림이라고 하니, 임지에서는 다들 놀라면서도 흥미있어했죠. 이런 정체성이 현지 외교활동을 할 때 딱딱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할랄푸드는 한국과 이슬람권을 잇는 외교적 문화적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8월 오유경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이 10일 2023 새만금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에 참가한 스카우트 대원들에게 할랄·비건 음식 제공하는 급식소를 방문해 위생점검을 하고 있다.

과격 이슬람 주의자들이 연관된 각종 테러나 전쟁 소식때마다 집중되는 한국 무슬림에 대한 관심은 그가 감내해야 하는 통과의례다. 최근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무장단체 하마스가 벌이고 있는 전쟁으로 이런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다. 현직 시절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요르단강 서안지구)으로 모두 출장을 다녀온 경험이 있는 그는 “어느 생명이든 존귀한 것은 마찬가지이며, 반인륜·반문명적 살상행위는 금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느 종교가 사람을 죽이라고 하겠습니까. 알라(이슬람의 신)든 야훼(유대교의 신)든 원치 않을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를 베풀며, 질서를 지키고 공존 공영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이든 하마스든 살상은 금지해야 합니다. 다만 힘센 강자 입장에서 이스라엘이 좀 더 아량을 베풀면 어떨까 해요.” 한국 사회 내 이슬람 혐오와 관련해서는 “반문명적·비인도적 테러가 일어날 때마다 이슬람을 호전적이고 과격한 종교라고 여기는 시선은 충분히 이해한다”면서도 “숲 속에 나무 몇그루가 썩었다고 해서 그 숲이 망한 것은 아님을 유념해 달라”고 말했다. “일부 극단주의자들의 행위만으로 전체를 평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총기사고가 많다고 해서 미국이 갱 국가는 아닌 것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