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아스타나 오페라 극장에서 열린 카자흐 정부 주최 나우르즈 외교 행사에서 전통 춤 공연이 열리고 있다. /정지섭 기자

이슬람권 국가들의 단식월 라마단이 한창인 19일 카자흐스탄 수도 아스타나의 오페라 극장 앞. 시간을 수백 년 전으로 거슬러간듯한 풍경이 펼쳐졌다. 레드 카펫 양옆으로 중세 유목민 왕조 전사들의 옷차림을 한 집채만한 군인들이 장검과 도끼 등을 들고 도열해있었다. 발레와 클래식 공연이 열리는 공연장은 거대한 유목민 마을로 변신해있었다.

카자흐스탄 정부 주최 나우르즈 외교 행사가 열린 19일 아스타나 오페라극장 앞에 중세 유목민 전사들 옷차림을 한 군인들이 도열해있다. /정지섭 기자

형형색색의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아시크(양의 뼈를 말로 삼아서 상대방 말을 잡는 놀이)나 아르칸 타르투(줄다리기)를 하고 있었고, 갈고리처럼 날카롭게 구부려진 발톱을 한 검독수리가 조련사 팔뚝에 앉아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다. 그 떠들썩한 파티장으로 카자흐스탄에 주재하고 있는 각국 대사와 배우자들이 속속 입장했다. 카자흐스탄의 설인 나우르즈(Nauryz)를 이틀 앞두고 열린 외교 행사였다. 나우르즈는 이 나라 최대 명절이자 공휴일이지만 국가 차원의 외교 행사로 마련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나우르즈 당일인 21일부터 닷새간 연휴다.

19일 아스타나 오페라 극장에서 열린 카자흐스탄 정부 주최 나우르즈 외교 행사에서 민속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정지섭 기자

나우르즈는 ‘새로운 날’이라는 뜻으로 고대 페르시아어에서 기원한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절기인 춘분과 일치한다. 목초지를 찾아서 이동해야 하는 유목민들에게는 풀이 돋기 시작하는 봄을 알리는 춘분을 새로운 해의 시작으로 알리고 경축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19일 아스타나 오페라극장에서 열린 카자흐스탄 정부 주최 나우르즈 외교 행사에서 전통 레슬링 경기가 시연되고 있다. /정지섭 기자

이날 행사에는 카자흐스탄의 정상급 예술인들이 총출동했다. 아스타나 오페라단 소속 성악가들이 금빛·은빛으로 수놓은 총천연색 민속 의상을 입고 교향악단의 라이브 연주에 맞춰 전통 민요 가곡을 불렀다. 전통 무용과 발레 공연이 쉴틈없이 이어졌다. 이날 초청대상인 외교사절들에게는 사전에 특별한 드레스 코드가 공지됐다. 가급적 카자흐스탄 민속의상 혹은 자기 나라의 민속의상을 입고 와달라는 것이었다. 카자흐스탄 전통 가운과 모자를 쓰고 온 조태익 주 카자흐스탄 대사는 “설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성대하게 쇠는 것도 그렇고, 전통놀이들이 줄다리기·공기놀이·씨름과 아주 닮았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와 친숙한 공통점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19일 열린 카자흐스탄 정부 주최 나우르즈 외교 행사에는 말과 양, 낙타, 소의 고기를 재료로 한 소시지와 훈제육 등이 대접됐다. /정지섭 기자

잔치에 빠질 수 없는 게 음식. 말고기, 낙타고기, 양고기와 쇠고기를 소금에 절여서 말린 뒤 잘게 저민 살라미햄이 가지런히 접시에 놓였다. 강인한 생존력으로 이름난 알타이사슴의 혀로 만든 훈제육도 등장했다. 조상대대로 손님에 접대해온 고급 전통음식들을 잔칫상에 올리되 외국인으로 자칫 느낄 수도 있는 이질감을 최소화하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이 날 행사는 해가 중천에 있던 낮 2시 30분에 시작해 3시간 넘게 떠들썩하게 이어졌다. 행사가 무르익자 손님들과 공연자들이 즉석에서 벌이는 전통 무도회도 펼쳐졌다. 해가 떠 있는 동안은 철저히 금식과 경건으로 일관하는 라마단의 통념과 거리가 있는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이슬람력은 윤달은 두지 않아 서양식 태양력과 차이가 있기 때문에 올해처럼 라마단과 나우르즈가 겹치는 해가 주기적으로 돌아오게 된다.

19일 카자흐스탄 정부 주최 나우르즈 외교 행사가 열린 아스타나 오페라 극장에 길들인 검독수리가 등장했다. /정지섭 기자

실제 라마단 기간 상당수 이슬람 국가에 주재하고 있는 각국 외교관·주재원·유학생과 여행객들에게는 각별히 행동에 조심하라는 경계령이 발동되지만, 카자흐스탄은 오히려 외교 사절들을 불러 떠들썩한 새해맞이 잔치를 벌인 것이다. 전통 명절 나우르즈를 홍보하는 동시에 자연스럽게 ‘카자흐스탄은 이슬람 교리에 얽매이지 않은 열린 나라’라는 것도 알리려는 이중포석으로 읽혔다. 실제로 카자흐스탄은 전체 인구의 73%가 무슬림이지만, 다민족·다종교 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에 소수 종교에 대한 차별과 불이익은 없다.

19일 아스타나 오페라 극장에서 열린 카자흐스탄 정부 주최 나우르즈 외교 행사에서 성악가들이 공연하고 있다. /정지섭 기자

3000여년의 역사를 가진 나우르즈는 카자흐스탄만의 명절이 아니다. 중앙아시아를 비롯해 발칸·카프카스·흑해·중동의 일부 국가들도 연중 최고의 명절로 쇤다. 그러다보니 나라별로 노브루즈·나브루즈·노루즈·네브루즈 등 이름도 제각각이다. 유엔에 따르면 전세계에서 이날을 설로 경축하는 인구는 3억명이 넘는다. 이날 행사에 자국 전통의상을 입고 참석한 이보조다 케이룰로 타지키스탄 대사는 “우리나라의 경우 공식적으로는 나흘간 휴일이지만, 전후해 한달동안 새해가 시작됐음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19일 아스타나 오페라 극장에서 열린 카자흐스탄 정부 주최 나우르즈 외교 행사에서 전통 악기가 연주되고 있다. /정지섭 기자

국제사회에서 제3세계와 이슬람권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나우르즈의 존재감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2009년에는 정상외교 무대의 소재로 활용되며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해 취임한 버락 오마바 미국 대통령이 취임 두 달만에 이란에 노루즈(나우르즈의 이란식 이름) 축하 영상 메시지를 보내면서 관계 개선 의사를 전했기 때문이다.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관계가 단절됐던 적성국가 이란을 향해 유화 메시지를 보내는 수단으로 ‘유목민의 설’이 활용됐다는 점에서, 미국과 중국 국교 수립의 물꼬를 튼 판다외교가 재현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성과는 없었다. 이듬해 유엔총회는 ‘국제 노루즈의 날’을 선포하며 지구촌의 기념일로 공인했으며 안토니우 구테흐스 사무총장이 매년 축하 메시지를 발표한다. 2016년에는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12개국의 공동발안으로 각국에서 쓰는 12개 명칭이 한꺼번에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각국의 협력 이면에 특정 국가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치열한 수싸움이 읽힌다.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이 지난 20일 소셜미디어에 나우르즈(노루즈) 등을 쇠는 국가 출신 주민들에게 새해 인사를 건네고 있다. /X

나우르즈 무렵은 카자흐스탄 항공업계 최대 성수기다. 아스타나·알마티·심켄트·악타우 등 주요 도시들을 잇는 국내선 비행기는 어린 아이들과 노인들을 동반한 가족 단위 귀성객들이 몰려들면서 만석이 되기 때문이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최대 명절인 나우르즈에 국경일 성격까지 가미하고 있다. 아스타나와 알마티 등 대도시 곳곳에 나우르즈를 경축하는 조형물이 등장했고, 각종 스포츠·문화 행사도 준비됐다. 이날 외교 행사도 그 일환이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 속에서 사실상 ‘노루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로 국제사회에 각인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카심 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최근 정부 행사에서 “나우르즈의 중요성을 끌어올려 새로운 방식으로 경축해야 한다”고 말하며 전통 명절을 국격 상승의 수단으로 활용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19일 아스타나 오페라 극장에서 열린 카자흐스탄 정부 주최 나우르즈 외교 행사에 마련된 전통 수공예품 코너. /정지섭 기자

중앙아시아 최대 영토·경제 대국이자 자원부국인 카자흐스탄은 최근 러시아·중국·중동·아시아를 연결하는 유라시아 중심국가를 자임하며 각종 국제행사 개최·유치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수도 아스타나에서는 올해 6월과 9월에 각각 유엔이 후원하는 대규모 국제회의(아스타나 국제포럼)와 전세계 100여국에서 참가하는 민속스포츠 종합경기대회인 제5회 세계노마드경기대회가 열린다. 한국의 씨름도 이번 노마드경기대회의 종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