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3일 중국 베이징 조어대 국빈관에서 만난 조태열외교부 장관과 왕이 중국 외교부장(오른쪽). photo 뉴시스

오는 5월 말 서울에서 개최 예정인 ‘한·중·일 정상회의’를 앞두고 한·중·일 3국의 신경전이 길어지고 있다. 외교부에 따르면 한·중·일 3국 정상회의는 오는 5월 26~27일 서울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3국이 최종 조율 중이다. 한데 한·중·일 3국은 구체적인 날짜를 최종 확정짓지 못하고 있다. 한·중·일 3국 정상회의를 앞두고 지난 5월 13일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베이징을 찾아 중국공산당 외사공작판공실 주임을 겸하는 왕이(王毅) 외교부장과 4시간 동안 마주 앉았지만 역시 정확한 날짜는 발표하지 못했다.

한·중·일 3국 정상회의는 2019년 12월 중국 쓰촨성 청두(成都)에서 마지막으로 열린 이후 코로나19 등을 이유로 지난 4년5개월간 열리지 않았다. 한·중·일 3국 정상회의가 오는 5월 말 서울에서 개최되면 4년5개월 만에 재개되는 첫 회의다. 한데 최종 조율 중이라고 언급되는 날짜가 불과 10일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아직 구체적인 날짜를 특정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중국, “대만 문제 적절히 처리하라” 경고

한·중·일 정상회의 날짜를 확정하지 못하는 주요 원인으로는 오는 5월 20일 예정된 대만 민주진보당(민진당) 라이칭더(賴淸德) 신정부 출범이 꼽힌다. 지난 1월 대만 대선 때 집권 민진당 후보로 나선 라이칭더 부총통이 총통에 당선되며 민진당이 정권 연장에 성공하자 중국 당국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 바 있다. 민진당은 그간 ‘대만독립’ 노선을 표방하며 ‘친미 반중 노선’을 견지해 왔다. 이에 대만 라이칭더 신정부 출범을 앞두고 한국과 일본이 어느 수준에서 반응하느냐를 중국이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관측이다.

주일(駐日)타이베이 경제문화대표처에 따르면, 오는 5월 20일 라이칭더 신임 대만 총통 취임식에는 무려 35명의 ‘일화(日華, 일본·대만)의원간담회’ 소속 의원들이 축하사절로 갈 예정이다. 역대 대만 총통 취임식에 참석한 일본 축하사절 규모로는 최다다. 여기에는 일화의원간담회 일본 측 회장인 후루야 게이지(古屋圭司) 의원을 필두로, 고(故) 아베 신조 총리의 부인 아베 아키에 여사도 동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주일 타이베이 경제문화대표처는 사실상 주일 대만대사관으로, 셰창팅(謝長廷) 전 행정원장(총리)이 대표로 이끌고 있는데, 대만과 관계를 중시한다는 확실한 신호를 보낸 것이다.

한국 역시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 최다선(6선) 의원으로 한·대만 의원친선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조경태 의원 등 몇몇 국회의원이 라이칭더 총통 취임식 참석차 대만에 갈 예정으로 알려진다. 조경태 의원은 2016년 차이잉원 총통 취임 때도 당시 이은재·이운용(이상 새누리당), 전순옥 의원(민주당) 등과 대만을 찾았다. 조경태 의원은 “참석 인원은 유동적”이라며 “한·중·일 정상회의에는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확대 해석을 경계했지만, 한·중·일 3국 정상회의 재개를 앞둔 중국으로서는 썩 유쾌하지 않은 소식이다. 이에 중국 측이 한·중·일 3국 정상회의 개최와 관련한 최종 발표를 미루고 있다는 관측이다.

중국 외교부에 따르면, 왕이 외교부장은 지난 5월 13일 조태열 외교부 장관과 마주앉은 자리에서 “한국 측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엄격히 지키고, 대만과 교섭하는 문제는 신중하고 적절히 처리해 양국 관계의 정치적 기초를 다져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진다. 대만 라이칭더 신정부 출범을 앞두고 1992년 한·중 수교협정을 체결한 조어대 국빈관에서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구두경고를 보낸 것. 중국 측은 지난해 4월 윤석열 대통령이 로이터통신과 인터뷰에서 “힘에 의한 대만해협의 현상 변경을 반대한다”는 국제사회의 원론적 입장을 밝혔을 때도, 정재호 주중 한국대사를 초치해 강력 항의한 바 있다.

중국 측의 이 같은 태도에 우리 외교가에서도 ‘한·중·일 3국 정상회의’의 연내 서울 개최에 굳이 목을 맬 필요가 있느냐는 회의론도 나온다. 한·중·일 정상회의는 1999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에서 김대중 당시 한국 대통령과 주룽지(朱鎔基) 당시 중국 국무원 총리, 오부치 게이조 당시 일본 총리가 별도 조찬회담을 가진 것을 계기로 2008년부터 별도 회의로 정례화됐다. 하지만 중국은 최초 회의 때 총리가 참석했다는 이유로, 2008년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린 제1회 한·중·일 정상회의 때부터 줄곧 국무원 총리를 이른바 ‘정상’으로 내세우고 있다.

국무원 총리를 ‘정상’으로 간주하는 문제는 2008년 제1회 후쿠오카 회의 때부터 줄곧 지적됐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중국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9인의 집단지도체제 아래에서 국무원 총리의 위상이 확실히 보장될 때였다. 하지만 지난 2012년 말 시진핑 정권 출범 이후부터는 총리의 위상이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마지막 회의였던 2019년 12월 쓰촨성 청두 회의 때는 중국을 방문한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베이징을 먼저 찾아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먼저 가진 뒤, 청두로 날아가 리커창 당시 총리와 또다시 ‘정상회의’를 하는 웃지 못할 광경이 펼쳐졌다.

리창, 역대 최약체 총리 평가

게다가 지난해 3월 시진핑 3기 정권 출범 후에는 그나마 ‘정상급’ 대접을 받았던 국무원 총리의 위상이 전례없이 추락한 상황이다. 특히 리창(李强) 현 국무원 총리는 역대 최약체 총리라는 평가를 받는다. 과거 ‘철혈재상’으로 평가받은 주룽지 전 총리는 말할 것도 없고, 원자바오나 리커창 전 총리에 비해서도 위상이 추락한 상태다. 심지어 지난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폐막 때는 역대 총리가 정례적으로 해왔던 총리의 폐막식 내외신 기자회견조차 생략됐다. 그간 중국의 내치(內治)를 총괄해왔던 총리의 내외신 기자회견이 생략된 것은 33년 만이다.

리창 총리는 당서열은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7명 가운데 2위라고 하지만, 실권은 시진핑의 비서실장 격인 중앙판공청 주임을 겸하고 있는 당서열 5위의 차이치(蔡奇) 중앙서기처 제1서기보다도 밀린다는 지적이다. 차이치는 중앙판공청 주임 자격으로 지난 5월 초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프랑스·세르비아·헝가리 등 유럽 3개국 순방에도 동행했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중앙판공청 주임 자격으로 국가주석의 해외순방에 동행한 것은 차이치가 최초다.

심지어 리창 총리는 지난해 6월 첫 해외순방으로 독일과 프랑스를 찾았을 때도 ‘전용기’가 아닌 ‘전세기’를 이용했다. 지난 1월 스위스와 아일랜드를 방문했을 때도 ‘전세기’를 탔다. 리창 총리의 전임자인 리커창 전 총리 때만 해도 총리는 ‘전용기’를 이용했고, 중국 외교부 역시 이를 ‘전용기’로 표현했다. 한데 리창 총리 때부터는 ‘전세기’라는 표현을 쓴다. 지난 5월 초 시진핑의 유럽 3개국 순방 때 중국 외교부가 ‘전용기’라고 표현한 것과 확실한 차이를 둔 것이다. 한 전직 외교관은 “중국은 과거 조공(朝貢) 관계에 있었던 아시아 각국을 상대로는 국무원 총리를 정상으로 내세워 사실상 하대해 왔다”며 “리창 총리가 방한할 때 무슨 비행기를 타고 오는지를 보면 진짜 정상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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