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당국이 전날 헬기 추락 사고를 당한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과 호세인 아미르 압돌라히안 외교장관의 사망 사실을 확인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20일 보도했다. 모흐센 만수리 이란 부통령은 이날 소셜미디어 엑스를 통해 “라이시 대통령이 탑승한 헬기가 전소된채 발견됐으며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익명의 이란 당국자도 로이터에 “라이시 대통령과 아미르압돌라히안 외무장관의 사망 사실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라이시 대통령은 19일 오전 아제르바이잔과 이란 국경에 양국이 공동 건설한 키즈-칼라시 댐 준공식에 참석한 이후 헬리콥터를 타고 이란 동(東)아제르바이잔주 상공을 지나 수도 테헤란으로 돌아가던 중 추락 사고를 당했다. 당시 라이시 대통령이 탄 헬기에는 이란 외교의 사령탑인 호세인 아미르 압돌라히안 외교장관도 동승했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라이시 대통령의 사망이 최종 확인될 경우, 지난 10월 발발해 8개월째에 접어든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으로 위태로운 중동 정세에 적잖은 영향이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란은 또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도 무기 지원을 하고 있어 우크라이나 전쟁에도 영향이 미칠 가능성이 있다. 라이시 대통령은 1979년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 이후 신정 체제 하에서 신학 교육을 받고, 사법부와 검찰에서 일했다. 이 과정에서 강경 보수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이면서 호메이니와 현재 이란의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의 명맥을 잇는 이란 정통 보수파의 적자(嫡子)로 여겨져 왔다.
라이시는 온건 개혁 성향이었던 하산 로하니 전 대통령의 후임으로 2021년 8월 집권했다. 2017년 선거에서 로하니에게 패배했지만, 보수표심이 대세가 됐던 두번째 도전에서는 62%의 득표율로 무난하게 당선됐다. 그의 취임 뒤 이란은 이슬람 종파 분쟁 라이벌인 사우디와 국교를 재개하는 등 이슬람권 국가들과 적극적인 화해를 모색했다. 반면 미국 및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적대 국면을 이어갔다.
특히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발발한 뒤에는, 팔레스타인의 하마스를 포함해 예멘의 후티, 레바논의 헤즈볼라 등 친이란 무장세력의 이스라엘 공격을 물밑에서 지원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란과 이스라엘은 사상 처음으로 상대국을 직접 공격하기도 했다. 지난 4월 이스라엘이 시리아 다마스커스의 이란 영사관을 공습하자, 이란이 이스라엘 남부를 향해 300개 이상의 드론 및 탄도·순항 미사일을 발사해 보복했고 이스라엘은 이에 이란 중부 이스파한의 핵 시설 인근 기지를 드론과 미사일로 재보복했다.
이란 시아파 성지 마슈하드 출신인 그는 열 다섯살에 신학교 입학했고, 1979년 호메이니가 주도한 반미·반정부 시위에 적극 동참하면서 이슬람 세력의 눈에 들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카라지와 하메단 등에서 검사로 일했고, 불과 스물 다섯살의 나이에 수도 테헤란을 관할하는 검찰청 차장검사에 올랐다. 이후 검사장·검찰총장을 거쳐 사법부 수장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의 법조 경력은 논란이 따라다닌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난 뒤 1988년 설치된 특별 법정 소속 판사로 활동하면서 반체제 인사들을 즉결 심판·처형하는 데 깊숙이 관여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국제인권단체들은 이 법정을 통해서 최소 5000명이 처형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에게는 ‘테헤란의 집행자’, ‘잔인한 도살자’라는 별칭이 따라붙었다.
라이시는 강경 보수성향의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재선하던 2009년 선거에서 부정선거가 자행됐다고 항의하는 시위 인파를 강경하게 진압한 핵심 주역으로 알려져있다. 또 집권 1년이 지난 2022년 9월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교경찰에 연행된뒤 의문사한 마흐사 아미니 사건이 기폭제가 돼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정부시위의 강경 진압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라이시는 이란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의 신정(神政) 체제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인식돼왔다. 이란 정치 체제에서 대통령은 최고지도자에 이은 국가 서열 2위이다. 호메이니 집권 이래 이란에서는 여덟 명의 대통령이 취임했는데, 이 중 초대 대통령인 압돌하산 바니사드르는 취임 1년 6개월만에 탄핵으로 실각했고, 후임 모함마드 알리 라자는 테러로 취임 불과 한 달 만에 목숨을 잃었다. 이후 대통령에 오른 인물이 현 최고지도자인 알리 하메네이다. 라이시는 하메네이의 최측근으로 향후 대통령직을 마치면 최고지도자에 오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져왔던 인물이다.
그는 이란 종교지도자중에서도 초강경 인사로 알려진 아흐마드 알라몰호다의 사위이기도 하다. 대학교수인 부인과 사이에서 두 딸을 둔 것으로 알려져있다. 2009년에는 사법부 제1 부수장 자격으로 이란 사법부 수장 방한단의 일행으로 한국을 찾아 대법원장 및 국회의장 등을 면담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