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9일 실시된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 정치 세력이 약진하면서 유럽 정치가 요동치고 있다. 극우 국민연합(RN)이 가장 많은 의석을 가져간 프랑스에서는 의회가 전격 해산되며 이달 말 조기 총선 일정이 잡혔다. 역시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집권당에 승리한 독일에서도 조기 총선 요구가 분출하고 있다. 유럽 정치의 ‘이단아’ 취급을 받아 온 극우가 ‘주류’로 발돋움하며 각국 정치 지형에도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민·난민 정책과 우크라이나 지원 정책에 상당한 변화가 올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11일 0시(한국 시각) 현재 개표 결과에 따르면, 프랑스 RN 등 극우 정당들의 정치 그룹(원내 교섭단체)인 ‘정체성과 민주주의(ID)’가 직전 선거보다 9석이 많은 58석을 확보할 것으로 예측됐다. ID는 강경한 반(反)난민 정책을 주장하고, 우크라이나 지원에 일부 비판적 태도를 보여왔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RN 돌풍에 밀려 집권 여당 르네상스가 참패하자 이날 자국 의회를 해산하고 30일 조기 총선을 치른다고 발표했다.

또 다른 강경 우파 정치 그룹 ‘유럽 보수와 개혁(ECR)’도 현재보다 4석 늘어난 73석을 차지할 것으로 예측됐다. 독일에선 AfD가 기존 의석의 2배에 가까운 15석을 얻으면서 중도 좌파 연정을 이끄는 올라프 숄츠 총리에게 참패를 안겼다. 이에 야권에선 조기 총선을 요구하고 나섰다.

ECR과 ID, AfD 의석을 모두 합치면 150석에 육박, 기존 유럽의회 내 최대 정치 세력인 중도파에 이은 ‘제2세력’으로 급부상했다. 유럽의회는 유럽연합(EU)의 입법부다. 회원 27국 국민의 직접투표로 회원국 인구 비율에 따라 할당된 임기 5년의 의원 720명을 선출한다.

그래픽=양진경

이번 유럽의회 선거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안보 위협, 에너지난과 공급망 위기, 난민과 이민자에 대한 정서 악화 등으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치러지면서 극우 정치 세력들의 약진으로 이어졌다.

극우 정파들의 돌풍은 어느 정도 예견됐다. 올해 초 여론조사 기관 유럽일렉츠와 정책 싱크탱크인 유럽외교관계위원회(ECFR)는 ID가 100석, ECR이 90석에 육박하는 의석을 확보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 두 그룹이 손을 잡으면 190석으로 유럽의회 내 최대 세력이 될 것이란 전망까지 나왔다. 선거를 앞두고 각국에서 극우 세력 견제 심리가 발동하면서 실제 결과는 이에 미치지 못했지만, 극우 정치 세력은 주류 정파로 덩치를 키웠다는 분석이 잇따르고 있다.

극우가 약진한 배경으로는 기존 EU 정치에 대한 유럽인들의 큰 실망감이 꼽힌다.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는 “각국에서 주류 정치권에 대한 불신, 또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감이 노동자와 농민을 앞세우는 극우에 대한 지지로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이로 인해 가장 큰 수혜를 본 정치인이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라는 평가도 나왔다. 그가 이끄는 극우 성향 이탈리아형제들(FdI)은 이탈리아에 배정된 76석 중 24석을 가져가면서 1위를 굳혔다.

극우 세력이 힘을 얻으면서 진보 세력은 후퇴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녹색당의 몰락이 두드러진다. 5년 전 선거에서 크게 약진했던 녹색당-유럽자유동맹(Greens/EFA)은 18석을 잃은 53석에 그쳐 EU의 친환경 노선이 후퇴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마크롱 대통령이 이끄는 프랑스 여당 르네상스(중도우파)와 올라프 숄츠 총리의 독일 집권 사회민주당(SPD) 연정도 각각 RN과 AfD에 크게 밀리는 굴욕을 겪었다.

기존 유럽의회의 최대 정치 세력인 중도 그룹은 전체 의석은 줄었으나 선방한 것으로 파악됐다. 최대 정파인 중도우파 유럽국민당(EPP)은 5년 전보다 10석이 많은 186석을 얻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찌감치 연임 도전을 선언한 EPP 소속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의 재선 가도에는 일단 청신호가 커졌다. 차기 EU 집행위원장 선거에는 마리오 드라기 전 이탈리아 총리도 뛰어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