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판 김 러시아정교회 대주교가 19일 평양 성삼위 성당을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 러시아 대통령을 안내하고 있다. 독실한 신자로 알려진 푸틴은 이날 자신이 가져온 성화를 성당에 선물했다. 김 대주교의 성삼위 성당 방문은 2006·2019년에 이어 세번째이고, 푸틴에게는 첫 방문이었다. /대한정교회

지난 19일 북한을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베트남으로 떠나기에 앞서 평양시내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소속 성삼위(聖三位) 성당을 찾았다. 십자가를 세운 황금색 돔 지붕의 이 성당은 러시아를 방문하고 돌아온 북한 김정일의 지시로 2006년에 완공됐다. 독실한 정교회 신자로 알려진 푸틴이 성당을 둘러볼 때 동양인 성직자가 동행했다. 러시아정교회 산하의 한국 내 교구인 ‘대한정교회’ 교구장 테오판 김(48) 대주교다.

사할린 한인 3세로 1976년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태어난 그는 10대 후반 러시아정교회 신자들과 우연한 기회에 어울리면서 신앙을 체험했다. 열아홉 살에 세례받은 뒤 본격적인 성직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모스크바상업대 유즈노사할린스크 분교를 졸업한 그는 ‘모태 신앙’이 아님에도 고위 성직자 자리까지 오른 드문 사례로 꼽힌다. 그는 2017년 대주교 서품을 받고 동시베리아 남부 투바공화국 수도인 키질교구장으로 임명됐고, 2019년 남북한의 러시아정교회 신도를 관할하는 대한교구장이 됐다. 대주교는 러시아정교회 성직 품계에서 총대주교, 관구장 주교 다음으로 서열이 높다. 러시아엔 한인 동포 신부가 10여 명 있는데, 대주교에 오른 사람은 김 대주교가 처음이다.

지난 19일 평양 성삼위 성당을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테오판 김 대주교의 설명을 듣고 있다. /대한정교회

그는 평소엔 서울 용산구 정교회 성당에서 봉직하면서 주한 러시아인과 귀국 러시아 동포들의 신앙생활을 돕고 있다. 평양 주재 러시아 대사관에 머물고 있는 그를 21일 화상으로 인터뷰했다.

-푸틴 수행단의 일원으로 평양에 갔나.

“아니다. 내 평양행은 이미 오순절(성령 강림을 기념하는 기독교 축일, 올해는 5월 19일)쯤부터 별도로 준비했고, 우연히 푸틴 대통령 방문과 겹쳤다. 성삼위 성당은 서울·부산 성당과 함께 우리 교구(대한교구) 관할이다. 2006년 축성식 때를 포함해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다. 2019년 방문 뒤 코로나가 창궐해 북한 가는 길이 막히는 바람에 다시 방문할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려왔다.”

-성당을 방문한 푸틴 대통령을 줄곧 근거리에서 안내했다. 성당에서 어떤 모습이었나.

“해가 저물어 어두워지고 종소리가 울려펴지는 가운데 대통령이 도착했다. 우리 교구에 대한 설명을 들은 다음에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성당의 이름이기도 한 성삼위(성부·성자·성령이 본질상 동일한 일체라는 기독교 교리)를 그린 성화(聖畵)가 성당 중앙에 있다. 이곳에 경배를 하고 촛불을 켜서 바쳤다. 그리고 본인이 가져온 선물을 성당에 기증했다. 역시 성삼위를 그린 성화였다.”

테오판 김 대주교가 평양 성삼위 성당에서 신자들을 위해 예배를 집전하고 있다. /대한정교회

-푸틴 대통령 방북 당시 평양 분위기는 어땠나.

“도시 전체가 나서서 러시아 대통령의 방북을 준비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도시 중심가 곳곳에 러시아·북한 국기와 함께 푸틴 대통령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환영사가 적힌 펼침막도 이곳저곳에서 보였다. 방송은 연신 푸틴 대통령 일행이 탄 차의 이동 장면을 전했다.”

종교를 ‘해악’으로 간주해 온 북한 정권은 1988년 장충성당과 봉수교회, 1989년 칠골교회 등 종교 시설을 잇따라 지었다. 성삼위 성당도 종교에 관대한 국가라는 이미지를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세워졌다는 시각도 있다. 이번 푸틴의 방문 때는 성당 내에 황금 옷을 입은 동양인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19일 평양 성삼위 성당을 방문한 테오판 김 대주교가 푸틴 대통령을 안내하고 있다. /대한정교회

-성당 내 황금 옷 입은 동양인들은 누구였나.

“북한 성직자들이다. 이곳에 북한인 사제(신부) 한 명과 보제(보좌역 성직자) 두 명이 있다. 이들은 러시아 하바롭스크에 있는 정교회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성직자로 서품되었다. 다만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신도들은 주로 평양에 주재하는 외교관 신자들이다.”

-한반도를 러시아 정교회의 새로운 전략 선교 지역으로 간주하는 것인가.

“우리의 한반도 선교 역사는 120년 전 이미 시작했다. 1900년대부터 선교사들이 파견돼 활동했지만 남북 분단으로 중단됐고 정치 상황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을 겪었다. 그러나 1990년 한국과 옛 소련이 수교한 뒤 많은 러시아인이 한국에 체류하게 됐다. 우리는 새로운 조직을 만든 게 아니라 기존 조직을 복구한 셈이다. 서울 중구 정동의 옛 선교회관 부지에 성당을 짓는 게 목표다.”

러시아정교회가 2019년 남북한을 관할하는 교구를 설립한 후 “러시아가 종교라는 소프트파워를 앞세워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이런 움직임이 외교적 마찰로도 이어지기도 했다. 기존 ‘한국정교회’가 ‘교회법의 합치를 위반한 행위’라고 반발했다. 세계 각지의 여러 정교회를 느슨하게 관할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청(튀르키예 이스탄불에 위치)’과 러시아정교회의 갈등도 깊어졌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엔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여러 국가에서 러시아정교회와 단절하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다른 나라 정교회와의 갈등에 대해 러시아정교회는 “우리는 교회법을 위반하지 않았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청 소속 교회가 먼저 교회법을 위반한데 대해 어쩔 수없이 대응하고 있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김 대주교는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로지 하나의 러시아정교회가 있었다”며 “러시아정교회의 일치성이 파괴되는 상황이 안타깝다”고 했다.

김정일의 지시로 2006년 건립된 평양 정백구역의 성삼위성당. /대한정교회

☞러시아정교회

러시아인의 75%가 신봉하는 기독교 분파.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세 나라의 모체인 중세 국가 ‘키예프루스’ 시기이던 988년 통치자 블라디미르 대공이 비잔틴 제국과의 관계 강화를 위해 비잔틴 황녀 안나와 혼인하며 세례받고 정교회를 국교로 제정했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의 국민 신앙으로 자리 잡았다. 1917년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지고 공산정권이 수립된 뒤 극심한 탄압을 받으면서 지하·해외 교회로 간신히 명맥을 잇다가 소련 해체 뒤 다시 영향력을 회복했다. 율리우스력을 따르고 있어 성탄절(1월 7일) 등 주요 축일 날짜가 천주교·개신교 등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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