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레이가 어디 있나? 여기 어딘가 있을 텐데. 멋진 친구요. 보수적인 친구(conservative guy)거든. 그런데 딸은 왜 그렇게 진보적(liberal)인 거요?” 지난달 27일 미국 공화당 대통령 선거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테네시주 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빌리 레이’는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자인 인기 컨트리 가수 빌리 레이 사이러스(63)다. ‘진보적인 딸’은 올해 그래미 팝 솔로 부문 수상자 마일리 사이러스(32)로, 공개적으로 트럼프를 비난해왔다.
미국 음악계에 ‘선거의 시간’이 닥쳤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대통령·부통령 후보 대진표가 완성되고 본격적인 유세전이 시작되면서 유명 가수들의 지지 대결도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빌보드 등 음악 전문 매체들은 후보별 지지 가수 등을 분류한 ‘음악 판세 분석’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통상 미국 대선에선 외국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팝 스타들이 적극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하고, 미국 국내에서 주로 활동하는 컨트리 가수들은 정치 성향을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공화당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하지만 올해는 사뭇 다르다. 공개적으로 트럼프 지지 목소리를 내는 뮤지션도 많아졌고, ‘오로지 컨트리 가수들만 트럼프를 지지한다’는 통념도 깨지고 있다.
민주당의 경우 현직 조 바이든 대통령이 연임 도전을 포기하고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으로 후보가 교체된 어수선한 상황을 수습하는 데 여성 팝스타들이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아리아나 그란데(31)는 해리스를 후임자로 지지한다는 바이든의 발표 직후 내용을 공유하면서 지지자들에게 유권자 등록 안내 사이트를 링크해 투표를 독려했다. 비욘세(43)는 해리스가 바이든 사퇴 뒤 처음으로 선거운동본부를 방문할 때 자신의 노래 ‘프리덤’을 사용할 수 있도록 재빠르게 승인해줬다. 신세대 팝스타 올리비아 로드리고(23)도 여성들의 낙태권 회복을 공약한 해리스의 영상을 소셜미디어에 공유하며 지지를 표명했다.
‘할머니 팝스타’들의 공개적인 지지도 잇따르고 있다. 포크 싱어송라이터 캐롤 킹(82)은 바이든 사퇴 직후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해리스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고 “딱 좋은 시기에 딱 좋은 사람”이라며 지지를 선언했다. 킹과 동갑내기이자 열혈 민주당 지지자로 유명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도 15일 유대계 여성들의 해리스 선거 자금 모금 행사에 화상으로 출연해 지지를 호소했다.
공화당 후보인 트럼프 편에 선 가수들은 세계적 인지도는 낮지만 크고 작은 라이브 공연을 통해 미국 내 ‘찐팬층’이 두꺼운 남성 컨트리 가수들이 주축이다. 공화당원 애창곡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God Bless the USA)’를 부른 리 그린우드(82)는 지난달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직접 무대에 올라 노래하면서 단상으로 등장하는 트럼프를 맞았다. 그린우드는 “1984년 전당대회에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위해 노래한 뒤 40년이 지나 카리스마와 힘이 넘치는 또 다른 대통령을 위해 부르게 돼 영광”이라고 말했다. 컨트리 듀오 ‘플로리다 조지아 라인’의 멤버 브라이언 켈리(39)는 트럼프의 선거 구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를 제목으로 최근 신곡을 발표했다. ‘거리는 마약과 불법행위로 가득하고/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위대하게 만들어야 할 때’ 등 노랫말은 트럼프의 연설 내용에서 그대로 따왔다. 지난달 초 써뒀던 노래를 트럼프 피격 사건을 계기로 앞당겨 발표했다고 한다. 트래비스 트릿(61)·키드 록(47)·저스틴 무어(40) 등도 트럼프를 지지하는 대표적 가수다.
예년과 다른 흐름도 감지된다. 속사포처럼 거친 랩을 쏟아내는 흑인 힙합 가수들의 지지가 잇따르는 것이다. 2016년부터 트럼프를 공개 지지해온 카녜이 웨스트(47)의 행보가 ‘흑인=민주당 지지’라는 공식을 벗어난 일탈로 여겨지던 분위기와 달리 아질리아 뱅크스(33)·코닥 블랙(47)·와카 플로카 플레임(38) 등이 공개적으로 지지 의사를 밝혔다. 와카 플로카 플레임은 심지어 한 공연에서 “바이든 지지자들은 여기서 나가라”고까지 말했다고 빌보드는 전했다.
이런 현상을 치안과 일자리 등의 성과를 앞세워 흑인 표심을 파고드는 트럼프 전략의 성공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미국 온라인 매체 마더 존스는 ‘더 많은 래퍼들이 트럼프 열차에 올라타고 있다’는 최근 기사에서 트럼프가 지난 6월 바이든과의 TV토론에서 ‘이민자들이 흑인 일자리(black jobs)를 훔쳤다’고 발언하는 등 이전 공화당 후보들보다 적극적으로 흑인 표심을 공략한다고 평가했다.
진영을 불문하고 최대 관심사는 팝의 ‘지존’ 테일러 스위프트(35)가 2020년에 이어 이번 선거에서도 민주당을 공개적으로 지지할 것인지, 그렇다면 언제가 될 것인지다. 스위프트는 팝스타이지만 컨트리로 음악에 입문해 ‘컨트리의 성지’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미국 내에서는 ‘컨트리의 피가 흐르는 가수’로 인식하는 경향도 있다. 뉴스위크는 “시간이 문제일 뿐 결국 스위프트가 해리스 지지를 선언할 가능성이 높다”는 홍보업체 돈틀리스PR의 루아나 리베이라 창립자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여성·소수인종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스위프트 팬과 트럼프 지지층은 어차피 거의 겹치지 않아 ‘스위프트 변수’는 크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