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미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해리스를 위한 공화당원’을 이끄는 조슈아 히턴씨가 자신의 집 앞에 세운 해리스 지지 푯말 앞에서 아이들과 함께 섰다. 애리조나주를 포함한 10주에선 11월 대선 선거 날에 낙태권 찬반 투표도 함께 실시한다. 낙태권이 이번 미 대선의 승패를 가를 핵심 이슈로 부상한 이유다. /오로라 특파원

“낙태권은 선택의 자유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이 권리를 지키려는 의지는 미국의 핵심 가치를 지키려는 희망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애리조나주 투손에 있는 애리조나대 내 한 교실에선 지난 8일 정오 즈음 10여 명이 모여 피자를 먹으며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행사 이름은 ‘주민 발의안 139: 청년 조직 피자 회의’다. ‘주민 발의안 139′는 오는 11월 5일 열리는 대통령 선거와 같은 날 찬반 주민투표에 부쳐질 낙태권 보장(주 헌법 명시) 법안을 가리킨다. 토론회에 참석한 애리조나대 2학년생 크리스티나 페트린씨는 “미국의 첫 여성 대통령 당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고 했다.

올해 미 대선일엔 일곱 개 경합주 중 두 개인 애리조나·네바다를 포함해 총 열 개 주가 낙태권 찬반 투표를 함께 실시한다. 민주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초박빙 승부를 벌이는 이번 선거에서 낙태권이 결정적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보수 우위 대법원이 낙태권을 연방법으로 보장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2022년 사실상 폐기하고 나서 낙태권은 미 유권자 사이에 가장 첨예한 이슈 중 하나로 굳어졌다. 특히 지지율 박빙으로 결과를 예단하기 어려운 이번 대선이 여성(해리스) 대 남성(트럼프) 구도로 치러지고 중산층 감세, 중국에 대한 강경 노선 등 기타 정책에 대한 두 후보 간 차별성이 줄어들면서 낙태권 문제가 ‘이번 대선의 최대 변수’(이코노미스트)가 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10일 오후 9시(현지 시각, 한국 시각으론 10일 오전 10시) 열리는 해리스 대 트럼프의 생방송 토론회에서도 낙태권 문제를 둔 날카로운 공방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해리스는 낙태권 확대에 찬성 의견을 확실히 표명해 여성·청년 부동층(浮動層)을 공략하고, 트럼프는 이들의 반발을 고려한 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동시에 보수 대법원을 옹호하며 ‘가족 가치’를 중시하는 보수층에 호소할 전망이다. 대선이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 열리는 토론회는 두 후보 간 처음이자 마지막 생방송 토론이 될 가능성이 크다.

8일 미국 애리조나 투싼 애리조나대학교에서 열린 낙태권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의견을 주고 받는 모습. /오로라 특파원

애리조나대에서 열린 낙태권 토론회는 여성 일색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남성 참석자들도 적잖이 보였다. 이들은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낙태권을 보장해야 하는 논리를 논의했고, 주변에 11월 선거일에 반드시 투표소에 나와서 ‘찬성’ 투표를 독려하자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낙태권 보장이 청년층과 고학력자들의 지지를 많이 받는 현실을 반영하듯 애리조나대 캠퍼스 곳곳에선 ‘주민 발의안 139′에 대한 지지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주민 발의안 139에 예스(Yes·찬성)를!’이라는 문구가 쓰인 피켓이 걸린 교실이 많았다. ‘세대 행동-계획된 가족’ 등의 문구가 인쇄된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학생과도 자주 마주쳤다.

이날 토론회를 주최한 민간단체 ‘애리조나 낙태 접근성을 위한 모임(Arizona for Abortion Access·AAA)’ 측은 “낙태권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대학을 돌며 학생들과 피자를 나눠 먹고, 대화를 나누는 행사를 주기적으로 마련하고 있다. 어제는 애리조나 주립대에서 같은 행사를 진행했고, 거의 매주 주 내 주요 학교들을 순회하고 있다”고 했다. '

8일 미국 애리조나대학교에서 열린 낙태권 토론에 참석한 클레어 나이프(오른쪽)와 해나 코너씨가 낙태권에 찬성하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있다. /오로라 특파원

토론회의 남성 참석자 롬 로빈스씨는 “임신은 두 사람의 일이다. 낙태권은 여성의 문제뿐 아니라 남성의 가족계획에도 영향을 주는 문제이기 때문에 관심을 안 가질 수 없었다”고 했다. 또 다른 남성 참가자인 에릭 로빈스씨는 “나는 여러분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로 낙태권이 미 연방 헌법상으로 보장되던 순간을 기억한다”고 했다. “불법 낙태 시술로 친구를 잃었던 엄마와 이모가 당시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애리조나주에서 낙태권이 위태로워지자 이모가 전화해서 묻습디다. ‘나는 이제 너무 늙어서 싸우지 못한다. 그런데 정정한 너는 뭘 하고 있느냐’라고요. 그 길로 낙태권 보장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여성의 권리 신장이 더디게 이뤄져 온 미국의 역사를 몸소 겪은 고령자들이 낙태권 축소에 가장 반대하는 집단 중 하나”라며 “이들은 자신의 생전에 여성의 권리가 후퇴할 수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 대선 선거인단 11명(총 선거인단은 538명)이 걸린 애리조나는 전통적으로 여느 남부주처럼 공화당이 강세인 ‘레드 스테이트’였다. 멕시코와 국경을 맞대 불법 이주자 문제가 많이 발생해, ‘국경 장벽’을 설치하면서까지 이들을 막겠다는 트럼프에 동조하는 이들이 여전히 적지 않은 지역이기도 하다. 하지만 애리조나가 낮은 법인세율(4.9%)을 내세워 기업을 많이 유치하고 그 영향으로 캘리포니아·뉴욕·일리노이 등 진보주에서 일자리를 따라 이주한 젊은이들이 늘며 민주당 지지율은 올라가기 시작했다. 최근엔 조 바이든 행정부의 IRA(인플레이션 감축법)에 기반을 둔 각종 세금 감면 혜택으로 인텔·TSMC 등 대기업 투자가 늘어나면서 민주당 지지세가 점점 강해지는 주로 꼽힌다. 최신 여론조사 결과 이곳에서 트럼프와 해리스 지지율은 각각 48%로 동률이었다.

그래픽=김성규

타지 출신이 적잖은 애리조나는 민주·공화당 소속이 아니라 사안에 따라 후보를 택하는 ‘무소속’ 비율이 전체 유권자의 3분의 1 수준으로 특히 많다. 이날 만난 학생 아말라 윌리엄스씨는 “이번 대선에서 내 선택은 ‘정당 대신 여성(women over party)’”이라며 “나 같은 무소속 유권자 중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다”고 했다.

과거 공화당원이었던 사람들이 이번 대선에선 ‘무소속’으로 전향하고 해리스를 지지하는 움직임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치후원회(PAC) ‘해리스를 위한 애리조나 공화당원들’ 리더십팀의 조슈아 히튼씨는 이날 “나는 여전히 보수적인 사람이지만, 법 때문에 의사들이 여성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역사가 뒤로 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편 보수적인 기존 애리조나 주민을 중심으로 낙태권 확대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여전히 적지 않다. 낸시 바토 전 상원의원 등은 3000명 이상의 자원 봉사자들을 동원해 낙태권 보장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다. 아울러 낙태권 확대는 ‘찬성’하지만 대통령은 트럼프를 선택하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으리라는 전망도 나온다. 지난달 폭스뉴스 여론조사에 따르면 애리조나주의 공화당 지지자 절반(50%)이 낙태권 보장에 찬성하겠다고 답했다. 민주당 지지자의 95%, 무소속 76%가 찬성해 ‘주민 발의안 139′의 전체 지지율은 73%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