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8월 18일 마오쩌둥의 홍위병 열병식에 참석하기 위해 천안문 앞에 운집한 홍위병들. 사진=퍼블릭 도메인

개혁·개방을 막 시작한 1979년 3월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년)은 사회주의의 길, 무산(無産) 계급 독재, 중국 공산당 영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毛澤東) 사상을 견지한다는 소위 ‘4항 기본 원칙’을 천명했다. 문화혁명 당시 그에게 가해졌던 ‘자본주의 복벽파(復辟派)’의 혐의를 선제적으로 차단하려 했던 절박한 의도가 읽힌다.

이후 3년 반쯤 지나 개혁·개방의 경제적 효과가 가시화됐을 때, 자신감을 얻는 덩샤오핑은 ‘중국 특색 사회주의’란 구호를 들고 나왔다. ‘중국 특색 사회주의’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의 지도 아래서 공산당 일당독재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서방 자본주의의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2049년까지 건국 100년의 대업(大業)으로 사회주의 현대화를 이룩한다는 구상이었다.

이후 반세기가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중국 공산당은 여전히 ‘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외치고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식초와 기름처럼 절대 섞일 수 없음에도 덩샤오핑은 명백하게 상충(相衝)되는 이념과 제도를 적당히 뒤섞고 교묘하게 끼워 맞추는 ‘절충과 봉합’의 간지(奸智)를 발휘했다. 그 결과 오늘날 중국에선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란 이름으로 아무렇지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뜨거운 얼음과도 같은 명백한 이율배반(二律背反)이 국가의 공식 이념으로 채택될 수 있는 ‘중국 특유의 사고방식’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강력한 선전·선동과 반복적 이념 공작을 통해 인민대중으로 하여금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조화로운 결합을 자연스럽게 믿게끔 하는 ‘중국 특색의 선전·선동’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중국 특색의 선전·선동’이 오늘날에도 ‘중국 특색의 포퓰리즘’으로 펼쳐지고 있다.

광장에서의 조리돌림과 밀실에서의 권력 찬탈

1969년 11월 12일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을 역임했던 류사오치(劉少奇·1898~1969년)는 감금 상태에서 고의적인 의료 방치로 사망했다. 문화혁명 당시 그는 홍위병(紅衛兵) 집회에서 조리돌림당하고, 가짜 뉴스에 인격을 살해당하고, 고무줄 재판을 통해 전 생애를 부정당했다. 그를 ‘역사적 반동’으로 몰기 위해 사인방(四人幇)은 특별조사단을 급조해 400만 건의 문서를 파헤치고 꿰맞췄다. 법률 기술자들을 동원한 무도막심(無道莫甚)한 법조 농단이었다.

류사오치의 명예가 회복되기까진 10년 3개월이 걸렸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년)이 사망하고 채 한 달이 못 된 10월 6일 사인방이 체포될 무렵에야 무덤 속 류사오치는 7년 만에 재심(再審)의 기회를 얻었다. 이 결과 1980년 2월 류사오치의 명예는 완전히 복권됐다. 이후 100위안 지폐에 마오쩌둥과 나란히 그의 초상화가 실렸다. 인민재판으로 처형당한 류사오치는 이렇게 중국의 역사에서 부활했다.

2016년 대한민국에서도 비슷한 사태가 발생했다. 청와대를 들락거리는 최순실이라는 비선(秘線) 실세가 태블릿PC로 대통령의 연설문을 손질했다는 한 언론사의 보도가 발표된 후 중고생까지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갈수록 시위가 확대되자 국회는 12월 9일 전격적으로 대통령을 탄핵했고, 이듬해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전광석화처럼 탄핵을 인용하고 대통령을 파면했다.

이 두 사건은 한국과 중국의 전혀 다른 시대에 거의 완벽하게 대척적인 정치 제도 아래서 발생했지만, 양자 모두 법의 지배를 무시한 순수 민주정(pure democracy) 혹은 민중 독재(the people’s democracy)의 양상으로 전개됐다는 점에서 상당히 유사하다.

한국의 국민, 중국의 인민

중국 정치에서 ‘인민’은 요술 램프의 신통(神通)을 발휘한다.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총강 제2조는 “모든 권력은 인민에 속한다”고 천명한다. 중국 영도자들은 누구나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 통치”를 말한다. 그들은 입만 열면 인민이 원하면 무엇이든 정당하다고 부르짖는다. 문제는 인민 개개인의 요구와 목적이 다 다르다는 점에 있다. 영도자들은 노상 인민을 들먹이지만, 지역, 민족, 재산, 성분(成分)이 다 다른 인민은 사분오열(四分五裂)될 수밖에 없다. 중국의 영도자들이 외쳐대는 인민은 전체 인민이 아니라 특정 부류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영도자들이 입만 열면 인민을 부르짖는다. 당원들을 다수로 내세운 후 슬쩍 인민으로 뒤바꾸는 통치의 속임수다.

한국 정치에서 ‘국민(國民)’은 요술 방망이의 마력(魔力)을 발휘한다. 대한민국 헌법 총강 제1조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천명한다. 국민이 권력의 원천임을 잘 아는 정치인들은 누구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치”를 말한다. 그들은 입만 열면 국민이 원하면 무엇이든 정당하다고 부르짖는다. 문제는 국민 개개인의 생각과 가치가 다 다르다는 점에 있다. 정치인은 노상 국민을 들먹이지만, 지역, 계층, 소득, 종교 등이 다 다른 국민은 다양한 집단으로 사분오열될 수밖에 없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들먹이는 국민은 전체 국민이 아니라 특정 집단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이럼에도 정치인들은 밤낮으로 국민을 외쳐댄다. 지지층을 다수로 바꿔 친 후 대뜸 국민으로 내세우는 정치적 야바위다.

두 헌법의 영문 번역을 보면, 놀랍게도 한국의 ‘국민’과 중국의 ‘인민’이 모두 ‘the people’이라 번역되어 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의 ‘국민’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이 동일한 개념이라 여긴다면 큰 착각이다. 한국어에서 국민이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탈계급적 개념이다. 이에 반해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은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가진 모든 인간이 아니라 적인(敵人)을 배제한 계급적 개념이다. 여기서 적인이란 지주, 부농(富農), 반혁명 세력 등 ‘인민의 적’을 의미한다.

정치적 야바위

국민과 인민의 의미는 이렇게 중대한 차이를 보이지만, 한국의 정치인들은 주야장천(晝夜長川) 국민의 이름을 들먹이고, 중국의 통치자들은 오매불망(寤寐不忘) 인민의 이름을 읊조린다. 한국 정치인들이 우려먹는 정치적 야바위와 중국 영도자들이 튀겨먹는 통치의 속임수는 훤히 속이 들여다보이는 판에 박힌 수법처럼 여겨진다. 이럼에도 양국의 대중은 매번 권력자의 이러한 얄팍한 꾐에 터무니없이 넘어간다. 양국에서 통용되는 그 수법이란 (1) 다수를 선점하고 (2) 전체를 참칭(僭稱)하는 두 단계의 논리적 비약을 안 들키고 범하는 정치적 선전술을 말한다. 권력자들은 늘 이렇게 전체 국민의 이름으로, 전체 인민을 들먹이며 권력을 행사한다.

물론 한국과 중국의 정치에는 결정적 차이점이 있다. 공산당 일당독재로 돌아가는 중국과는 달리 한국은 여러 정당이 상호경쟁을 하는 다당제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으며, 헌정사에서 실제로 4차례나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실현했다. 이럼에도 권력을 잡기 위해 국민(혹은 인민)을 판다는 점에서 절대 부정할 수 없는 공통점이 보인다. 바로 포퓰리즘(populism)이다.

포퓰리즘, “민주주의의 영원한 그림자”

미국 프린스턴대학의 정치이론가 뮐러(Jan-Werner Müller) 교수에 따르면 ‘포퓰리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반(反)엘리트주의와 반다원주의(反多元主義)다. 반엘리트주의란 선동가들이 흔히 말하는 “한 줌밖에 안 되는 부패하고 타락한 지배층”에 대한 저항감을 의미한다. 반다원주의란 오직 자신들만이 전체 민중을 대변한다고 확신하는 태도를 가리킨다.(Jan-Werner Müller, What is Populism? Univ. of Pennsylvania Press, 2016)

포퓰리스트(populist) 정치인들은 언제나 엘리트를 부패하고 타락한 집단으로 악마화하는 한편, 민중을 순결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이상화한다. 곧이어 그들은 바로 자신들의 당만이 민중(국민) 전체를 올바르게 대변하는 유일무이한 민중(국민)의 정당이라고 부르짖는다. 바로 이런 이유로 포퓰리스트는 언제나 전체로서의 민중(국민)을 들먹인다. 스스로 전체로서의 민중(국민)을 대변한다고 부르짖는 자는 모두가 예외 없이 포퓰리스트라 할 만하다. 바로 이 점에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어둠이다. 뮐러 교수가 말하듯, “포퓰리즘은 대의제(代議制) 민주주의의 영원한 그림자이자 상시적(常時的) 위험이다.”

물론 포퓰리즘은 선거를 치르는 자유민주주의만의 문제는 아니다. 국민이든, 인민이든 ‘피플’을 전면에 내세워 권력을 쟁취하거나 행사한다면 모두 포퓰리즘이라 할 수 있다. 공산당이 국가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중국에서도 독재는 인민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서 인민의 이름으로 자행된다.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야말로 인민의 이름으로 인민에 의해 인민을 억압한다. 특히 중국의 포퓰리즘은 반엘리트주의와 반다원주의의 가장 극단적 사례를 보여준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류사오치의 죽음은 중국식 포퓰리즘이 초래한 가장 극적인 사례 중 하나였다. 문혁 시절 중국에서 자행된 광장에서의 조리돌림과 밀실에서의 권력 찬탈은 모두 ‘민주’의 이름으로 자행된 야만적 집단 폭력이었다.

‘민주’를 강조했던 마오쩌둥

1966년 8월 18일 천안문 문루에서 홍위병을 사열하는 마오쩌둥. 홍위병 완장을 차고 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의아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중국 공산당 영도자들은 단 한 번도 민주의 가치를 부정한 적이 없다. 중국 밖에선 ‘일인 지배의 독재자(autocrat)’라는 혹평에 휩싸인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는 놀랍게도 2012년 집권 이후부터 줄곧 민주를 부강(富强)에 버금가는 사회주의적 핵심 가치로 공공연히 선양해왔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에서 민주를 가장 강조했던 영도자를 한 명 들라면 단연 마오쩌둥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마오쩌둥은 산간벽지의 농민들을 규합하여 소비에트를 건설하고, 지주와 부농의 땅을 접수해 토지개혁을 실행하고, 인민을 동원하여 반혁명 세력에 대항하는 비판·투쟁을 전개하는 모든 과정을 민주주의의 실현이라 확신했다. 이뿐만 아니라 전국의 청소년들이 들고일어나 당내의 주자파와 수정주의자들을 색출해 비판·투쟁을 가하는 문화혁명 시기 홍위병 운동이야말로 군중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사회주의 혁명을 실현하는 대중 민주주의의 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중일 전쟁(1937~1945년)이 고조되던 1940년 1월 발표한 ‘신(新)민주주의론’에서 마오쩌둥은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의 정치 체제를 ‘자산 계급 독재 공화정’이라 비판하면서 “중국 방식의, 특수한, 신식의 민주주의, 곧 신민주주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국공내전(國共內戰·1946~1949년)에서 중국 공산당의 승리가 거의 확실시되던 1949년 6월 30일 중국 공산당 창당 28주년 기념식에서 발표한 ‘인민민주독재에 대하여’에서 마오쩌둥은 인민민주독재란 “바로 반동파(反動派)의 발언권을 빼앗고, 인민에게 발언권을 주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마오쩌둥의 뜻을 받들어 오늘날 중국 헌법의 총강 제1조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노동자 계급이 영도하는 노동자·농민의 연맹에 기초한 인민민주독재의 사회주의 공화국이다”라고 천명한다.

“인민을 위해서 복무한다”

대체 마오쩌둥은 그 어떤 논리로 객관적으로 폭민(暴民) 정치(mobocracy)나 대민(對民) 테러에 불과한 이 모든 극단의 사례를 ‘민주’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려 했을까? 그는 어떻게 인민의 이름에 민주와 독재를 결합한 ‘인민민주독재’를 중국 특색의 민주주의라 공공연히 떠벌릴 수 있었을까? 그는 민주를 과연 어떤 원칙, 어떤 제도, 어떤 정신이라 여겼던 것일까? 마오쩌둥에서 시진핑까지 이어지는 중국의 영도자들은 대체 무슨 논리로 중국 공산당 일당독재로 돌아가는 오늘날의 중국이 민주주의를 추구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을까?

민주주의라 하면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로 유권자가 직접 국가의 지도자를 선출하는 선거 민주주의(electoral democracy)를 떠올리는 중국 밖의 세계시민으로선 중국 공산당이 민주를 외치는 모습이 야릇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오늘날 대부분의 문명국에서 민주주의는 단순히 다수결(多數決) 원칙에 입각한 순수한 절차적 민주주의(pure procedural democracy)가 아니라 자유, 인권, 법치 등의 중요한 가치를 반영하는 실질적 민주주의(substantive democracy)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전일적(全一的)인 일당독재를 시대적 소명이라 천명하는 중국공산당이 공공연히 민주를 선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공공연한 거짓인가? 독재의 가림막인가? 먼 미래를 위해 남겨둔 정치적 희망인가? 중국 공산당은 대체 민주의 의미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마오쩌둥은 이미 북미와 서구의 민주주의는 기껏 부르주아 이익에 복무하는 자산 계급의 집행 기구에 불과하다고 말한 바 있다. 중국 공산당 영도자들은 실질적인 양당제(兩黨制) 정치 위에서 정기적인 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경계하고 불신한다. 하버드대학 페리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 영도자들이 생각하는 민주는 고대(古代) 유교의 전통에 뿌리내린 “민을 주로 하는(以民爲主)” 민본(民本)사상이나 위민(爲民) 통치의 이상에 가깝다. 영도자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초등·중등 과정의 공교육을 이수한 중국인 대다수도 ‘민주’라 하면 정부가 “인민을 위해서 복무한다(爲人民服務)”는 정도라 여긴다.

맹자에서 마오쩌둥까지

계몽적 자유주의에 근거한 자율적 개인의 정치적 참여, 정부 권력에 대한 국민적 감시와 법적 제약 등은 중국 공산당이나 중국 민중의 직접적 고려 대상이 아니다. 중국 공산당이 선양하는 민주의 가치는 맹자(孟子)의 민본(民本) 사상에서 마오쩌둥의 군중 노선(mass line)으로 면면히 이어지는 전통적 포퓰리즘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민본의 관점에서 보면, 정부가 인민의 생활고를 해결하고 복리를 증진하면 민주를 실현했다고도 할 수 있다. 권위주의 개발독재를 통한 경제 성장도 민주의 확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Elizabeth Perry. “The Populist Dream of Chines Democracy”,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Vol. 74, No. 4 2015: 903-915)

물론 ‘민주’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민본주의나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위민 통치 정도로 정의하는 중국 공산당의 논리는 공민(公民)의 자유와 인권을 제약하는 독재 정권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의 지식인 중에서도 중국 공산당의 공식 이념에 경도되어 민주를 소극적으로 해석하는 부류가 적잖다.

페리 교수의 지적대로 중국 대중이 민주를 민본주의나 위민 정치 정도로 여긴다면, 그 이유는 유교(儒敎) 문화에 뿌리내린 전통의 관성(慣性)이라기보다는 독재 정권의 사상교육과 정치적 억압 탓이라 볼 수밖에 없다. 이미 1919년 5·4 운동 당시에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에 따라 중국의 정치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헌정(憲政) 논쟁을 벌였던 일군(一群)의 지식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2013년까지도 중국의 지식계에선 5·4운동 당시의 자유주의 담론을 되살려 미래 중국의 정치체제를 개혁하는 본격적인 헌정 담론이 일어났었다. 정보가 통제되고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 사회에서는 인민의 정치적 상상력은 크게 제약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중국이 바로 이런 경우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1949년 이래 중국 현대사는 민주주의의 기치를 들고 인민을 앞세워 적인(敵人·인민의 적)을 감시하고 억압하고 처형하는 ‘인민민주독재’의 역사였다. 지주, 부농, 반혁명 분자, 불순 분자, 악랄 분자 등등 인민 속에 숨어 있는 5~10%의 적인을 잡아서 비판·투쟁한다는 명분 아래 중국 공산당은 다수 군중을 불러모아 인민 스스로 적인을 욕하고 벌주고 때리고, 심지어 학살하게 하는 무수한 정치 캠페인을 연출했다. 이 모든 과정이 인민의 이름으로 전개된 참된 민주주의의 과정으로 미화(美化)됐다. 이 점에서 중국 공산당은 전형적인 포퓰리스트 정당이었다.

1966년 마오쩌둥은 과연 어떻게 전 중국을 문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정치적 마술을 부릴 수 있었을까? 국방부 린뱌오(林彪·1907~1971년)의 인민해방군에서 시작된 마오쩌둥 인격 숭배의 광열이 중앙선전부의 선전 활동을 타고 학원가와 사회로 퍼져나가 청소년과 청년층의 의식을 점령했기 때문이었다. 막강한 군사력과 광범위한 대중 동원력은 1949년 이래 중국 공산당의 양대(兩大) 권력 기반이었다.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영도자는 다름 아닌 27년간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희대의 포퓰리스트 마오쩌둥 자신이었다.

문혁 야사(野史)에 따르면, 수도를 떠나 남방에 체류하던 마오쩌둥은 1966년 2월 대소련 군사 훈련을 이유로 베이징(北京) 군구의 병력을 네이멍구(內蒙古) 국경 지대로 이동시킨 후, 랴오닝(遼寧)성 선양의 제38군을 텅 빈 베이징으로 진격시켜 포위하는 군사작전을 펼쳤다. 류사오치나 덩샤오핑 등 중공 중앙의 영도자들에게 “너희는 이미 포위됐다”고 알리는 마오쩌둥의 무력(武力)시위였다. 마오쩌둥이 이렇게 무력을 장악하지 못했다면, 문혁의 개시는 애초 불가능했다. 젊은 시절 그가 꿰뚫어 봤듯, 권력은 진정 총구에서 나오지만, 총구에서 나온 권력은 직접 총칼을 쓰는 대신 인민을 앞세워 정권을 보위하게끔 한다.

표면상 중국 공산당은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받았지만, 그 밑바탕엔 막강한 군사력이 있었다는 얘기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될 당시 중국 공산당의 지상군 병력은 570만 명에 달했다. 마오쩌둥의 명언 그대로 중국 공산당의 권력은 인민이 아니라 총구에서 나왔음이 틀림없다.

홍위병을 동원한 마오쩌둥

문화대혁명 기간 중 곳곳에서 홍위병에 의한 잔혹한 조리돌림, 학대, 폭행, 살인이 자행되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총구에서 나온 권력을 잡은 마오쩌둥은 총칼이 아니라 인민을 앞세워서 인민에 대한 통치를 강화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끊임없는 정치투쟁, 군중집회, 사상개조, 이념교육으로 전 인민을 공산주의적 인간형으로 개조하려 했다. 특히 초등·중등 교육 과정을 통해 신세대 청년층에 대한 강력한 이념교육이 가능해지면서 중국 공산당은 미증유의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게 되었다. 문혁을 기획해 일으킬 수 있었던 마오쩌둥의 파워는 바로 군사 지휘권과 인민대중 동원력이었다.

1966년 8월 중순부터 11월 말까지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는 “대천련(大串聯)”이란 이름 아래 무려 10차례에 걸쳐 마오쩌둥이 직접 주재하는 대규모 홍위병 집회가 개최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교통편과 숙식을 제공하면서 전국의 홍위병들을 불러 모았고, 덕분에 1200만 명의 홍위병들이 멀리서나마 마오쩌둥을 직접 알현하는 영광을 누렸다. 마오쩌둥은 “조반유리(造反有理)”, 곧 반란을 일으킴에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한마디로 홍위병 운동에 불을 질렀고, 흥분한 홍위병들은 그해 8월과 9월에만 잔악무도한 방법으로 무려 1772명의 ‘계급 천민’을 학살하는 이른바 ‘홍팔월(紅八月)’의 참극을 이어갔다. 베이징의 홍위병들은 기차를 타고 상하이(上海)로 가서 문혁의 광풍을 전했다. 문혁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하이 노동자들은 대규모 조직을 형성한 후 상하이 지방정부를 탈취하여 코뮌을 세우는 탈권(奪權)의 드라마를 이어갔다.

마오쩌둥에게 버림받은 홍위병

그때부터 마오쩌둥은 인민해방군을 투입하여 문혁에 참여하는 혁명 군중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후 1년 7개월에 걸쳐 전국에 인민해방군이 이끄는 혁명위원회가 들어섰다. 이때부터 마오쩌둥은 사분오열되어 무장투쟁을 일삼는 군중 조직을 향한 통제의 고삐를 조이기 시작했다. 마오의 부름에 부응하여 맹렬하게 일어나던 군중 조직은 군부독재 아래서 조직적인 탄압과 박해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마오쩌둥은 군중 조직을 일으켜 당·정·관 각층 조직에 암약하는 수정주의자를 색출하는 광란(狂亂)의 마녀사냥을 일으켰지만, 무장된 군중 조직이 통제를 벗어났을 땐, 가차 없이 군대를 투입하여 그들을 제압하고 숙청했다.

문혁의 전반기는 군중이 정부를 공격하는 민정관(民整官)의 과정이었다. 문혁의 후반기는 정부가 군중을 징벌하는 관정민(官整民)의 과정이었다. 마오쩌둥 사상의 보위를 외치면서 전국에서 일어났던 홍위병 집단들은 결국 마오쩌둥에게 버림받고 산간벽지로 하방(下放)되었다. 중국 공산당 자체 조사에 따르면, 문혁 10년의 대동란 과정에서 1억1300만 명이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마오쩌둥은 희대의 포퓰리스트였다. 그가 구상한 모든 정책은 인민을 위한다는 구호 아래 “군중 노선”의 원칙을 내걸고 추진되었다. 대약진운동(1958~1962년)이 인류사 최대의 대기근을 초래했음에도 마오쩌둥은 혁명의 광열로 인민의 머리를 덥혀서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희대의 대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마오쩌둥이 발휘했던 막강한 권력의 기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인민대중을 원하는 방향으로 몰아갈 수 있는 그의 포퓰리스트적 재능을 무시할 수 없지만, 그가 장악한 군사 무력이 더 근원적인 정치권력의 원천이었다.

시진핑 시대의 홍위병 ‘소분홍’

2017년 6월 30일 홍콩 주둔 중국군을 사열하는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 군대는 중국공산당 권력의 원천이다. 사진=AP/뉴시스<宋在倫>

마오쩌둥에게 홍위병이 있었다면, 오늘날 시진핑에겐 소분홍(小粉紅·분노 청년)이 있다. 소분홍이란 국내 문제뿐 아니라 민감한 외교 이슈가 터질 때면 정권의 편에 서서 과격한 언사로 인터넷을 도배하며 여론몰이를 주도하는 20대의 애국주의 징고이스트(jingoist) 집단을 말한다.

홍위병과 소분홍은 여러모로 닮았다. 과격한 청년 집단이 자발적으로 최고 권력의 보위를 자처하며 가상의 적을 향해 집단적 공격성을 드러내는 패턴이 비슷하다. 과격분자들이 폭력과 만행을 자행할 때 권력과 언론이 나서서 ‘조반유리’나 ‘애국유리(愛國有理·나라를 사랑함에 그만한 이유가 있다)’라는 구호로 그들의 행동을 감싸주는 행태도 비슷하다. 1960년대와 2020년대 1인당 GDP는 120배 이상 성장했지만, 중국 특색 포퓰리즘은 다음 세 가지 점에서 일관된 양상을 보인다.

첫째, 최고 권력과 친위(親衛)부대 사이의 긴밀한 의사소통과 정치적 상호작용을 들 수 있다. 친위부대는 권력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읽고서 기민하게 움직이고, 권력자는 그들의 과격한 활동에 초법적(超法的) 면죄부(免罪符)를 제공한다.

둘째, 친위부대에 대해 최고 권력이 갖는 비대칭적 힘의 우위를 들 수 있다. 최고 권력은 권력 강화를 위해 친위부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만, 정치적 효용이 소진되면 언제든 그들을 억누르고 버릴 수도 있다.

셋째, 친정부적 정치 활동의 이력은 중국 특유의 사회적 신용체계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중국 특유 포퓰리즘의 이러한 세 가지 특징은 정치적 반대를 허용하지 않는 일당독재, 다양성을 용납하지 않는 전체주의적 정치 문화, 대중적 상호감시와 집단주의적 사유 경향, 제한된 정보 유통과 디지털 감시망의 확립이 없이는 설명될 수 없는 자발적 민정(民政) 유착 현상이다.

‘민중의 힘’에 대한 국가권력의 비대칭적 우위

문혁 과정의 대민(對民) 학살이나 1989년 천안문 대학살이 말해주듯, 중국 공산당은 언제든 필요하면 인민을 포로로 잡고 진압할 이념적·정치적 태세를 갖추고 있다. 중국 현대사는 총구에서 나온 권력은 언제나 인민을 앞세워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지만, 필요할 땐 언제든 인민을 제압할 수 있었음을 증명한다. 중국 현대사에 즐비한 대민 테러의 기록과 중국 인민의 뇌리에 아로새겨진 공포의 기억은 중국 인민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한다. 막강한 국가권력 앞에서 중국 인민은 너무나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민중의 힘(people power)에 대한 국가권력의 비대칭적 우위, 바로 이 점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중국 특색 포퓰리즘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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