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엄청난 변화의 문턱에 함께 서 있습니다. 급격하게 떠오른 인공지능(AI)의 부상은 창조산업을 통째로 바꾸고 있어요. 우리는 변화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이 변화는 상상과 혁신과 미래를 새롭게 바꿀 것입니다.” 이달 2일 중앙아시아 나라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의 대형 국제회의장인 센트럴 아시아 엑스포. 흰색 정장에 회색 상의와 리본을 맨 여성이 연단에 올라 수 백명의 청중 앞에서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연설했다. 글로벌 패션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세계적인 모델 나오미 캠벨(54)이었다.
그가 나흘 일정으로 이날 개막한 세계창조경제회의(World Conference on Creative Economy·WCCE)에서 기조연설에 나선 것이다.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런웨이를 누비던 모습에 익숙했던 그가 마이크앞에서 연설하는 장면은 물론 연단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모습까지 청중들의 시선이 쏠렸다. 캠벨은 AI발(發) 거대한 변화를 언급하면서 “우리가 서로 가진 지식을 공유함으로써 창조경제를 이끌어올려 모두가 이익을 향유하는 미래를 건설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즈베키스탄 방문이 처음이라는 그는 현지 매체인 더 쿤즈 인터뷰에서는 “아직 온전히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활기차고 역동적인 모습이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캠벨을 비롯해 각계각층의 글로벌 유명인사 130여명이 참가한 WCCE가 사흘 일정(10월 2~4일)으로 열렸다.
2018년 창설된 WCCE는 첨단 기술을 기반으로 인류가 일군 부(富)를 어떻게 하면 인류에 이로운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를 큰 화두로 도시·문화·패션·디자인·정보기술 등의 명사들이 대담과 연설을 통해 방법을 고민하고 공유하는 대규모 국제회의다. 앞서 인도네시아 발리와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열렸고, 올해는 중앙아시아 최대 도시인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개최됐다. WCCE는 개최국 우즈베키스탄 예술문화개발재단을 비롯해 인도네시아 관광창조경제부, 유엔 산하 전문기구인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와 세계지식재산기구(WIPO)가 공동으로 주관했다. 첨단과 창의를 메인 테마로 삼는 대규모 국제회의를 유엔과 이슬람권 국가들이 협업해 주최하는 모양새다.
주관 기구 중 한 곳인 UNCTAD는 한국과 인연이 남다른 곳이기도 하다. 일방 원조가 아닌 무역과 통상을 통해 개발도상국의 발전과 선진국과의 협력을 도모하는 일을 주업무로 해온 이 기구는 2021년 7월 한국을 아시아·아프리카 개도국 그룹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승격시켰는데, 1964년 기구 창설 이래 전무후무한 일이다. 레베카 그린스펀 UNCTAD 사무총장은 이날 기조연설에서 “통계가 나오는 나라들의 자료를 보면 각국의 국내총생산(GDP)에서 창조경제 분야가 차지하는 비중이 7~12%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며 여러 분야에서 곤경에 봉착한 국제사회가 관심을 가질 것으로 호소했다. 카타르 왕가의 일원으로 전세계 문화·예술 분야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셰이카 알 마이사 빈트 하마드 빈 칼리파 알 타니 카타르 박물관·도하 영화연구소·카타르 리더십센터 회장도 이날 연단에 올랐다.
그는 기조연설에서 “창조산업의 활력과 성장은 우리가 빈곤·불평등·청년실업·기후변화 같은 여러 도전을 이겨내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회의를 통해 우즈베키스탄은 글로벌 국가로 인지도를 높이겠다는 의도를 곳곳에서 드러냈다. 중앙아시아 최대 인구대국인 우즈베키스탄은 그간 한국에는 수려하고 이국적인 우즈벡인들의 외모와 스포츠강국 정도로 인식돼왔던 게 사실이다. 특히 지난 파리올림픽에서 금메달 8개를 쓸어담으며 종합 12위에 올랐다. 특히 복싱·레슬링·유도·태권도 등 무술에서만 집중적으로 금메달을 수확하면서 ‘전사(戰士)의 나라’라는 이미지로 굳어지기도 했다.
실제로 우즈벡인들은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거대 제국을 건설했던 티무르를 자국의 영웅으로 삼으며 그의 후예임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이번 WCCE 개최를 통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자국의 소프트파워를 부각시키는데 주력했다. 회의가 개최된 센트럴 아시아 엑스포는 타슈켄트 외곽에 최근 건립된 초현대시설 국제회의장이다. 1만㎡(약 3000평)에 달하는 회의장 곳곳은 이 나라 전통문양을 재해석한 현란한 디지털 조명으로 번쩍번쩍했다. 그 중 1376㎡(약 416평)에 우즈벡 전통 문양을 수놓은 양탄자가 깔렸다. 가야네 우메로바 우즈베키스탄 예술문화재단 대표는 “중앙아시아에서 처음 개최된 이번 WCCE회의에서 논의되고 합의된 사항들을 통해 우리의 독창성과 기교가 전세계에 전달됐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회의는 최근 지정학적 요충지이면서 고속성장 중인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중요 국제회의를 잇따라 개최하며 자국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11일 또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인 투르크메니스탄의 수도 아시가바트에서는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서방의 제재와 견제에 몰려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그리고 반(反) 이스라엘 무장세력인 이른바 ‘저항의 축’의 기둥 역할을 하며 이스라엘과 전면충돌 가능성이 우려돼온 이란의 마수드 페제시키안 대통령이 전격회동해 국제사회의 시선이 쏠렸다. 두 사람의 회동 계기는 아시가바트에서 개최된 튀르크권 국가 협력체 포럼이었다. 앞서 지난 7월에는 중국이 주도하는 국제협력체인 상하이협력기구 정상회의가 열린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푸틴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정상회담을 갖고 서방 견제 속 찰떡 공조를 과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