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됐습니다. 그 성공사례를 다른 나라들과 공유하고 있죠. 한국 같은 사례가 더 많이 나와야 하는데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개발도상국이 농업을 통해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전담하는 유엔산하 전문기구인 국제농업개발기금(IFAD)의 알바로 라리오(47) 총재는 지난 15일 서울 중구 조선일보사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하며 한국을 자립의 모범사례로 제시했다. 그는 6·25 전쟁의 폐허 직후 세계 최빈곤국이었던 한국이 자급자족을 이루는 과정을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이라고 불렀고, IFAD 정책이 지향하는 방향과 걸맞는 이상적인 선례로 ‘새마을 운동’을 거론했다.

본지와 인터뷰한 국제농업개발기금 알바로 라리오 총재. /정지섭 기자

유엔 산하 기구는 크게 ‘유엔 사업 및 기금’, ‘유엔 전문 기구 및 유관기구’, ‘기타기관’의 셋으로 구분된다. IFAD는 세계문화유산 등재로 잘 알려진 유네스코, 코로나 국면에서 중대한 역할을 한 세계보건기구(WHO), 북한 핵개발과 일본 후쿠시마 원전 등의 뉴스 때마다 등장하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1990년대 한국 현대사에 깊은 그림자를 남긴 구제금융의 주체 국제통화기금(IMF) 등과 함께 25개 ‘유엔 전문 기구 및 유관기구’ 중 한 곳이다. 스페인 출신인 라리오 총재는 전임 토고 출신 길버트 훙보(63) 총재가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으로 옮겨가면서 2022년 열린 특별 총회에서 불과 마흔 다섯의 나이에 취임했다. 유엔 관련 기구 수장 중 최연소로 알려져있다.

취임 후 처음으로 한국을 찾은 그는 농림축산식품부의 송미령 장관을 만나 한국과 IFAD의 스마트농업 등 분야에 대한 협력을 논의했다. 또 세계 식량의 날이었던 16일에는 서울대 국제대학원을 찾아 기후 위기 등 악조건 속에서 식량 자급을 위한 국제 협력의 중요성 등을 강조했다. 그는 1978년 IFAD 창설 멤버로 합류한 한국과의 인연을 언급하면서 “한국은 초창기 멤버이자 리더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며 “다자 체제에 대한 신뢰가 줄어들고 있는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이 보여준 경제 개발과 사회발전 이야기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엔 산하 기구에 담당 분야가 개발도상국의 농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조건없이 지원하는 원조(aid) 전담 기관일 것 같은데, IFAD의 핵심 업무는 원조가 아니 투자(invest)다. 다시 말해서 무조건 퍼주는 게 아니라 빌린 만큼의 금액에 이자를 붙여서 돌려받는다는 것이다. 라리오 총재도 여러 차례 IFAD의 본질이 ‘투자’에 있음을 강조했다. 이는 IFAD의 본질이 구호·원조 기관이 아닌 투자·금융기관이라는 본질과도 부합한다. “우리가 주로 집중하는 곳은 전세계의 소규모 농가입니다. 이 지역에 대한 투자를 통해서 관개시설을 개선하고, 경작지를 넓히고, 양질의 품종의 종자를 보급해서 수익을 창출하도록 돕는 것이죠. 그렇게 함으로써 농가 빈곤층의 삶을 변화시키는 겁니다.”

본지와 인터뷰한 국제농업개발기금의 알바로 라리오 총재. /정지섭 기자

그래서 각 회원국에서 분담한 출연금 뿐 아니라, 투자의 취지에 동감한 연기금 등 ‘큰손’들로부터 자금을 융통해 재원을 마련한다. 다만 0.5%안팎의 저리의 이자로 만기는 최장 50년까지 설정된다. 빌린 돈은 어떻게든 갚도록 하는 게 원칙이고 예외를 둔 적은 없었다고 했다. 이렇게 투자되는 자본을 라리오 총재는 ‘사회 자본(social capital)’이라고 정의했다. “그렇게 사회 자본을 투입해서 농가가 소득을 창출하고, 저축한 돈으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며 점차 삶을 향상시키는 것, 그 발전이 바로 우리가 얻는 투자 수익입니다.”

IFAD에는 다른 유엔기관에는 없는 특별한 게 있다. 바로 신용등급이다. 3대 신용 평가사로 한국인들에도 익숙한 피치에서 2020년 10월 최초로 신용등급을 부여받았는데 둘째로 양호한 AA+(안정적), 단기 투자등급에서는 F1+을 받았다. 당시 재정 책임자로 있던 라리오 총재가 이를 주도했다. 이를 토대로 채권발행까지 시작하면서 재원을 넓혔다. 올해 초에는 10억 스웨덴 크로나(약 1300억) 규모의 채권도 발행했다. 파산할 일 없는 국제기구가 굳이 신용등급을 받기로 한 것에 대해 라리오 총재는 “민간분야로부터 더욱 활발히 자금을 끌어모아 농촌으로 연결시켜주자는 데서 나온 아이디어였다”고 했다.

세계 식량의 날이던 지난 16일 서울대 국제대학원에서 강의를 마친 알바로 라리오 IFAD 총재가 학생들과 함께 했다. /국제농업개발기금(IFAD)

라리오 총재는 런던비즈니스스쿨에서 경제학 석사,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재무학 석사를 받고, 스페인을 대표하는 명문대이자 세계 최고(最古) 대학 중 하나인 마드리드 콤풀루텐세 대학교에서 금융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민간 회사를 거쳐 세계은행에 몸담았으며 2018년 IFAD로 왔다. 경제 엘리트로 화려한 이력을 갖고 공공 부문에 몸담은 것에 대해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 또한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것은 다른 분야에서 얻을 수 없는 특별한 성취감이 있다”고 말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우크라이나 전쟁, 팬데믹, 기후변화 등 전세계 식량 안보에 영향을 미친 여러 위기가 있었다. 이에 대한 해결방안을 묻자 라리오 총재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 내의 시장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양한 품종의 종자를 개발해 농업 생산력을 높여서 지역 사회회복력을 높여야 합니다. 이런 문제는 단시간내에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회복력을 어떻게 높일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