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의 홀로코스트가 본격화되면서 유럽 전역의 수용소에 있던 수용자들은 독일로 끌려왔다. 말이나 소를 싣던 열차 화물칸에 성냥갑처럼 포개진 수용자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옮겨졌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작품 ‘쥐’ 속 화자이자 생존자 블라덱 슈피겔만 또한 기존에 수용됐던 아우슈비츠가 폐쇄되자 다하우로 이송되었는데, “끔찍한 곳, 다하우. 이곳에서 나의 고난은 시작됐다”고 회상하며 아우슈비츠보다 더 큰 비참함을 겪은 곳으로 꼽는다.
메르켈이 과거사 책임 강조 위해 찾은 곳
지난 11월 5일(현지시간) 바이에른주 뮌헨에서 1시간 거리에 위치한 다하우역 숲속. 검은 빛깔로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걸으니 2층 건물의 새하얀 수용소 입구에 닿았다. 독일 내 최대 규모의 수용소였던 다하우수용소는 나치 정권 최초의 강제 수용소다. 동시에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유지된 유일한 수용소이기도 하다. 나치 수용소 중 가장 잘 알려진 폴란드 아우슈비츠수용소도 이곳을 모델로 해 지어졌다. 집시, 동성애자, 범죄자들은 물론 독일이 점령한 국가들의 국민들까지 잡아가둬 나치의 독재와 인권침해, 홀로코스트의 상징이 된 장소다. 서류상으로만 이곳에서 3만2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 모두 나치의 희생자에 대한 책임이 있다.” “이것을 반복해서 자각하는 것은 모든 독일 국민에게 부과된 의무다.” 2차 세계대전 70주년을 맞이해 독일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가 국민의 과거사 책임을 강조하기 위해 찾은 곳도 다하우수용소다. 현직 총리가 이곳을 찾은 것은 메르켈이 처음이었다.
독일에는 나치 유산과 관련된 공식 기념관만 220여개가 있다. 우리말로 번역한 ‘기념관(gedenkstätte)’이라는 단어는 독일어로는 ‘생각하는 장소’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 장소에서 희생당한 피해자를 생각하는 곳인 동시에 희생을 초래한 억압 체제를 생각하는 곳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날것 그대로의 과거 고통과 직면하게 보존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잔인한 문구가 적힌 수용소 대문을 지나 내부로 들어가니 대학 캠퍼스와 엇비슷한 크기의 수용소 모습이 드넓게 펼쳐졌다. 쭉 뻗은 길 좌우로 거대한 가로수들이 정면을 향해 늘어서 있고, 그 뒤 20여개의 막사가 있던 자리에는 잡석이 채워져 있었다. 250명씩 수용하도록 설계한 막사에는 1600명씩 몰아 넣어졌다. 수감자들은 닭장과 같은 침상 위, 이가 드글거리는 볏짚에서 티푸스병에 옮아 죽어갔다고 한다. 그 빽빽한 공기를 상상하면서 걸었다. 발아래 자갈들이 달각거리며 서로 부딪쳤다. 경계석만이 남은 황량한 땅이었지만 역설적으로 그 빈 땅 위에서 고통이 더 잘 그려졌다.
다하우뿐만 아니라 독일의 수용소 기념관들은 모두 옛 수감자 막사를 복원하지 않고 그 흔적만을 보존한다. 대표적으로 한두 사동만을 복원하여 당시의 실상을 전한다. 축구장 크기보다도 큰 황량한 터를 빈 상태로 두는 이유는,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전체적인 경관과 폐허가 자아내는 분위기를 훼손하지 않은 덕에 과거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다하우수용소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은 보고 듣는 전시 관람이라기보다는 그때의 공기를 짐작하는 체험에 가까웠다. 예컨대 과거 다하우수용소였던 이 장소의 이름은 지금도 ‘다하우수용소’다. ‘다하우 민주주의 전시관’ 같은 이름으로 가해의 역사를 숨기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독일 현지 투어나 교육에서는 탐방의 시작을 수용소 내부가 아니라 다하우 기차역에서 시작하기도 한다. 수감자들이 내렸던 바로 그 역에서부터 수용소에 이르기까지 똑같이 걸어보며 수감자들과 그들을 인솔하던 친위대를 상상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때 참가자들에게는 피해자와 가해자 외에, 지나가던 길거리의 시민 또한 인지되기 마련이다. 나치 폭력의 현장에 방관자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방식이라고 한다. 실제로 전쟁이 끝나고 수용소 인근에 있던 마을 사람들은 많은 경우 “수용소가 있는 줄도 몰랐다”고 밝히기도 했지만, 이 같은 방식은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가르침을 준다.
수용소에 처음 도착한 수감자들이 발가벗겨졌던 건물, 매일 최소 2시간씩 꼼짝없이 서있었다는 점호 공간, 나무 받침대 위에 묶여 매를 맞을 때 사용했던 황소 채찍, 시체를 옮기던 용도의 수레 등 건물 내부에는 수용소의 생활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각각의 장소마다 실제 사진과 복원품, 그리고 담담한 설명으로 전시가 구성된다. 또한 각 시기별로 음식제공, 시설, 수용소 정책 등 패악질의 정도가 어떻게 변했는지 또한 생존자 영상, 통계 등을 통해 보여준다.
나치는 수감자들에 모기 전염병, 비행기 고도, 저체온증, 약품 등 각종 인체실험을 이들 수감자에게 가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가스실에서 화장터로 이어지는 살인 공장을 설계해 대규모 살상도 저질렀다. 이렇듯 극악의 범죄를 전시하는 코너에는 가해 책임자의 실명이 낱낱이 박제돼 있었다.
지난 11월 6일 찾은 뮌헨의 나치기록박물관 또한 ‘갈색집(Braune Haus)’으로 불렸던 나치당 중앙당사(NSDAP-Parteizentrale)의 자리에 그대로 지어졌다. 뮌헨은 나치운동의 ‘수도’였고, 나치 체제의 중추 가운데 하나였다. 나치당의 성장과 권력 장악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뮌헨이 그 역할을 했다는 것은, 곧 뮌헨 시민이 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의 집중 폭격 대상이 되어 전쟁이 끝나고 철거된 뒤 2000년까지 이곳은 빈터였지만, 이후 독일의 다른 나치 관련 장소가 기념관, 기록관으로 운영되자 뮌헨 나치 당사 자리만 예외로 남았다는 비판이 생겼고, 뮌헨 시의회가 새로이 건물을 올려 2015년에 완공되었다.
히틀러의 정치적 고향으로도 불리는 뮌헨은 나치당이 창당된 곳이고, 1923년 히틀러와 루덴도르프가 이끄는 폭동이 일어난 곳이며,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나치당 지도부와 사무처가 있던 곳이다. 나치기록박물관은 이 도시가 나치체제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나치 이후에는 어떻게 변화했는지 연도별로 기록해뒀다. 전시관 내부에 뮌헨 시내가 보이는 뷰의 창문이 외부를 두르고 있었는데, 이 위에 까만 종이를 설치하고, 내부에 주요 장소에서 일어났던 사진과 설명을 위치시키자 해당 건물 및 풍경과 현재의 뮌헨 시내의 풍경이 겹쳐 보이는 효과가 났다.
“재건축도, 복원도 아닌 오로지 보존만 한다”
바이에른주 뉘른베르크에서의 여정에서는 ‘있는 그대로’를 고집하는 독일의 방식이 더욱 확연히 드러났다. ‘히틀러가 사랑한 도시’ 뉘른베르크는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뒤 수십만 군중이 참석한 성대한 전당대회를 열어 나치당의 힘을 과시한 곳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대규모 군중집회의 기록이나 웅장한 곳에서의 히틀러 연설은 대부분 이곳에서 일어난 일이다.
뉘른베르크시 동남쪽 약 4㎢의 평지에 히틀러는 웅장한 ‘나치 전당대회 도시’를 구상했다. 이곳에는 약 2㎞에 달하는 행진로, 5만명 수용이 가능한 의사당 건물, 수만 명의 청년을 모이게 할 수 있는 스타디움, 축구장 12개 이상 넓이에 최대 20만명을 수용 가능한 광장과 지지자들을 내려다볼 거대한 연단, 1주일 동안 진행되는 전당대회 동안 참가자들이 머물 광장 등이 건설될 계획이었다. 특히 전당대회장 외관은 로마에 있는 콜로세움 유적을 모방해서 만들었다. 1939년에 2차대전이 일어나면서 공사가 중단돼 완공하지 못한 채 현재의 모습으로 남았는데, 만약 완공됐다면 세계 최대의 돔이 됐을 것이라고 한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적은 전당대회장, 채플린광장, 행진대로 세 가지다. 지난 11월 3일 기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 전당대회장과 채플린광장은 노후화 등을 이유로 한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이 유적들은 나치의 행적을 기억하고 되풀이하지 말자는 취지에서 법률에 의해 보존이 결정됐지만, 자연적으로 허물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철거, 폐쇄하여 없어지게 두느냐, 아니면 보존하느냐에 대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뉘른베르크시가 2018년 역사학자, 연구자, 건축가 등을 모아 이에 대해 토론하는 심포지엄을 연 결과 파괴되거나 유실된 유적을 재건하고 복원하지 않되, 주요 유적에 일반 시민, 학생들이 접근해 과거의 상처를 느낄 수 있도록 유지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곳의 보수 유지 사업에 대해 담당자는 “재건축도, 복원도 아닌 오로지 보존만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 같은 토론과 고민의 과정은 공사 현장에 고스란히 묻어나 있었다. 채플린광장에만 10개가 넘는 안내판을 곳곳서 볼 수 있었다. 안내판에는 나치의 흔적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 기억하려는 공사를 ‘왜’ ‘어떻게’ 진행할 것이며, 공사가 끝나면 ‘어떤 모습으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질 것인지’ 상세히 안내되어 있었다.
예컨대 광장의 거대 연단의 전경이 잘 보이는 곳에 ‘새로운 성찰 포인트’인 ‘반성을 위한 지점’이 네 군데 설치될 것이라는 안내판이 있었다. “What does this have to do with me? Why did I come here? What do I expect?(이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나는 여기에 왜 왔는가? 나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등을 써붙여, 새로운 소통을 자극하고, 방문객이 본 것을 자신의 현실에 두고 성찰하도록 장려한다는 것이었다.
역사적 사안에 대한 논쟁도 그대로 전달
이와 관련해 독일 교육계에서 있었던 논쟁이 하나 있다. ‘보이텔스바흐 합의’가 그 논쟁으로부터 도출된 결과인데, 독일 교육계, 특히 역사 교육과 시민 교육에서 교육자가 지켜야 하는 기본 규범으로 통용되고 있다. 이 원칙들 중 ‘논쟁 재현’의 원칙은 논쟁이 있는 역사 사안을 그대로 가져와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공평하게 전달하고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영웅 동상을 세우는 과정에서 논쟁이 있었다면 이 사건을 교과 과정에서 소개할 때 학생들에게 특정한 견해가 스며들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그러나 이를 숨길 것이 아니라 그 갈등과 토론, 논쟁의 과정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판단을 수용자에게 넘긴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채플린광장에서 새롭게 제공될 정보를 포함해 주간조선이 방문한 모든 기록관에서는 역사 관련 건축이나 설치를 둘러싼 토론에 대해 아주 최근의 것까지 다루고 있었다.
같은날 오후 찾아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기념관의 600호 법정 또한 전쟁 중 저지른 범죄를 단죄한 최초의 재판을 기억하기 위해 보존되고 있었다. 이곳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치 독일과 유대인 학살 전범을 다룬 국제 군사 재판이 일어난 곳이다. 이 법정은 시민들에게 그대로 개방되어 있으며, 전범 재판이 열렸던 70여년 전의 현장이 실제 법정 위에 상영된다. 이곳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열린 나치 전범 재판은 2021년이다. 독일은 나치 정권하에 경비원, 비서직 등을 맡았었던 100세가 넘은 노인을 불러다 살인방조죄 혐의 등 책임을 물었다. 개인 또한 폭력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려는 태도가 기념관, 기록관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독일 곳곳에는 일상에서 나치 피해자들을 추모할 수 있는 공간들이 많다. 지난 11월 7일 찾은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묘지는 나치 정권 시절의 ‘유대인 게토’ 지역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유대인 게토는 나치의 폭력 정책 중 하나로, 유대인이 모여 살도록 법으로 강제한 도시의 거리나 구역을 뜻한다. 현재는 아파트, 상가 등이 들어서고 차도가 옆으로 나있는 평범한 거주 지역이었지만, 묘지를 둘러싸고 있는 벽에는 나치로부터 희생된 프랑크푸르트 출신 유대인들의 이름이 모두 작은 명패의 형태로 붙어 있었다. ‘안네의 일기’의 저자 안네 프랑크의 명패 앞에서 만난 하인츠 다메(50대)씨는 명패마다 올려진 작은 돌멩이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꽃 대신 추모의 의미로 돌멩이를 얹는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돌에 대해 영원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이 길을 지날 때마다 유대인들의 희생에 대해 영원히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다.”
묘지 내부에는 유대인의 묘지를 나치가 파괴한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다. 6000개가 넘는 묘 중 나치에 의해 훼손되지 않고 남아있는 묘는 2000개에 불과했는데, 그마저도 완전히 부서지거나 이리저리 누워 있는 묘지 비석이 많았다. 그러나 독일 정부는 그 잔해를 치우거나 다시 세우기보다는, 부서진 묘비 조각을 각각 모아 한곳에 두고, 뒤로 넘어져버린 묘비 비석은 그대로 땅에 눕혀두는 등의 방식으로 고스란히 그 역사를 보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