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마(火魔)가 훑고 지나간 자리엔 무엇도 남지 않았다. 12일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서부 부촌 퍼시픽 팰리세이즈 지역은 닷새 전 시작한 초대형 산불에 휩쓸려 제대로 된 건물의 형태조차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폐허가 되어 있었다. 불길은 LA를 상징하는 길 선셋대로(Sunset Boulevard)도 비껴가지 않았다. 퍼시픽 팰리세이즈는 할리우드까지 연결되는 35㎞ 선셋대로의 서쪽 끝이다.
선셋대로는 인간의 욕망과 광기를 그려낸 1950년도 동명(同名)의 할리우드 영화 배경으로 유명하고, 고급 주택과 상점가가 있어 연중 관광객들이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화마에 휩쓸린 선셋대로 서쪽 끝은 인류 재앙을 다룬 공상과학영화 장면처럼 비현실적이었다. 곳곳에 불타버린 건물의 앙상한 철제 프레임과 차량 뼈대들이 위태롭게 서 있었고, 한때 벽과 천장을 지탱했을 철근들은 고열을 못 버티고 휘어져 나뒹굴었다. 까맣게 탄 나무와 타일, 벽돌들은 위를 지나갈 때마다 부서져 재로 변했다. 동네 주민 벤 해링턴씨는 “모든 것이 불타버려 참혹하다”라며 “다 타버린 집에서 뭐라도 건져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했다.
LA를 집어삼킨 역대 최악의 산불이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도시 전역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산불에 지금까지 타들어간 면적만 약 162㎢(서울 면적의 27%)이고 건물 1만2300여 채가 소실됐다. 사망자는 24명까지 늘었다.
그러나 가장 큰 규모의 퍼시픽 팰리세이즈 산불의 진화율은 13%, 이턴 산불은 27%에 불과해 대피한 주민들은 “아직 멀쩡한 내 집도 끝내 타버리는 게 아니냐”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소방대원은 “내일부터 시속 96㎞에 달하는 강풍이 불 것으로 예상되는데, 지금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상황이 악화될 수도 있다”며 “땅을 오염시키는 문제가 있는 바닷물까지 부어 가며 산불을 막고 있다”고 전했다. 이번 산불 진화를 위해 미국의 아홉 개 주, 국경을 맞댄 캐나다와 멕시코에서도 소방 지원 인력이 투입됐다.
경찰은 불이 휩쓸고 지나간 선셋대로에서 차로 10분 거리 밖에 있는 지역까지 출입을 통제하고 나섰다. 집주인의 대피로 텅 비어버린 동네 곳곳에는 노란색 폴리스라인과 차량의 진입을 막는 주황색 콘(원뿔형 교통 표지)이 세워져 있었고, 주요 진입로에는 경찰과 함께 주 방위군과 장갑차가 상주하고 있었다. 대피 지역의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는 세실 아베이씨는 “어제까지 주민의 출입을 허락했는데, 오늘 와보니 아예 못 들어가게 막고 있다”며 “파손된 집들에서 가스가 누출돼 폭발 사고 가능성이 있다고 들었다”고 했다. 불이 처음 시작되던 7일 퇴근하던 그는 뭉게구름처럼 커지는 연기를 눈앞에서 보고 그 길로 산불 지역을 탈출했다. 그는 “눈앞에서 나무와 건물이 타고 있는데 집에 가서 짐을 챙길 정신이 없었다”며 “내 아파트는 다행히 다 타지 않았다고 들었지만, 지난 5년간 살았던 동네가, 내 삶이 사라져버렸다. 이 참담한 심정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통제 구역에서 불과 200m 거리에 있는 상점가도 텅 빈 모습이었다. 이 지역에서 20년 넘게 살았다는 리처드 위릭씨는 “평소 맛집과 아기자기한 카페들이 즐비해 현지인은 물론 해외여행객까지 북적거렸던 곳”이라며 “할리우드 여배우 귀네스 팰트로가 창업한 식당 ‘굽 키친’이 자리할 정도로 목이 좋은 곳인데, 인근 주민이 사라지며 가게 문을 여는 사람도 없어졌다”고 했다.
출입 통제 구역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웨스트우드 레크리에이션센터의 강당은 미국 적십자사가 운영하는 주민 임시 쉼터로 바뀌었다. 입구에서 간단하게 거주지 확인 절차를 밟으면 침대 자리 하나를 배정해주는 식으로, 누군가 친구나 지인 집으로 떠나며 빈자리가 나면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졌다. LA에서만 대피령이 떨어진 인구가 18만명으로 늘어나면서, 이틀 전까지만 해도 20~30명이 사용하던 이 쉼터엔 현재 240여 명이 몰렸다. 이날 강당 밖 주차장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어린 딸과 함께 시설을 이용하고 있다는 샌타모니카 주민 올리아 티안씨는 “(여러 사람이 모여 지내는) 상황이 편할 수는 없지만, 급하게 싸온 짐만으로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을 얻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대규모 대피령으로 피난민과 빈집이 속출하면서 현장에는 이름 모를 기부 같은 선행과 빈집털이를 하는 악행이 교차했다. 이날 임시 쉼터에선 피난민을 위한 물과 음식을 옮기는 자원봉사자들이 쉴 틈 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중에서는 자기자신이 긴급 대피 대상으로, 쉼터에서 밤을 지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그는 “가만히 있는다고 상황이 변하지도 않고, 뭐라도 돕고 싶어 잡일을 거들고 있다”며 “인근 주민들이 담요나 옷 등을 기부해오고 있어 물품들을 정리하고 나누며 암담한 상황에 조금의 희망을 보고 있다”고 했다. 이날 통제 구역에서 만난 고등학생 스테펀 브룩스는 “이번 산불로 인해 학교에서 자선 활동을 준비하려고 현장을 찾았다”며 “폐허가 된 참상을 찍어 짧은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친구들에 보여줄 생각”이라고 했다.
반면 긴급 대피령으로 비어 버린 집을 노리는 범죄도 늘어나고 있다. 12일 폭스뉴스 등 외신에 따르면 LA 경찰은 대피 지역인 부촌 브렌트우드에 있는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집에 침입한 두 명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말리부 해변 지역 거주민인 치과의사 마크 톰슨씨는 “전날 동네에 돌아갔었는데, 이웃 주민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돌아다녀도 경찰들은 아무 제재도 하지 않았다”며 “지금 빈집에 이름 모를 사람들이 살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화가 난다”고 했다. 12일부터 강화된 출입 통제에 대해 그는 “실제로 범죄 가능성이 늘어나니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