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1917~1989) 전 대통령의 아들이 내년 5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지지율 1위로 급부상, 부자(父子) 대통령 탄생 여부가 주목된다. 로이터통신은 22일(현지 시각) 여론조사 업체 아시아펄스를 인용해 이달 초 필리핀 전국의 24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차기 대선 후보 조사에서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주니어(64) 전 상원의원이 53%의 지지율을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그는 지난 10월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이어서 레니 로브레도 현 부통령(20%), 프란시스코 도마고소 마닐라 시장과 복싱 선수 출신 매니 파키아오 상원의원이 나란히 8%였다.

그래픽=양인성

필리핀 대통령은 6년 단임으로 로드리고 두테르테 현 대통령은 출마할 수 없다. 두테르테는 부통령이나 상원의원으로 출마하겠다는 뜻을 밝혀오다 최근 이를 철회했다. 그 대신 딸인 사라 두테르테-카르피오(43) 다바오 시장이 마르코스 주니어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출마를 선언했다. 대통령과 별도로 뽑는 부통령 지지도에서 사라 두테르테-카르피오는 43%의 지지율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 이에 따라 현재의 여론 흐름이 이어질 경우 내년 5월에 필리핀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아들과 공권력 남용으로 임기 내내 비난받던 현 대통령의 딸이 대통령·부통령으로 선출돼 필리핀을 이끌게 된다.

1965~1986년 필리핀을 철권 통치하다 시민혁명으로 쫓겨났던 마르코스 집권기는 필리핀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로 꼽힌다. 1965년 대선 승리로 집권한 그는 집권 초기 과감한 경제 발전 정책이 국민의 지지를 얻어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경제난과 빈부 격차 심화, 부패 만연 등으로 지지율이 급락하자 1972년 계엄령을 선포하고 의회를 해산,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신사회 건설’이라는 정치적 구호를 내걸고 야당과 언론을 탄압했다. 측근 전횡과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1983년 8월 니노이 아키노 전 상원의원의 암살로 촉발된 반정부 시위의 전국적인 확산은 마르코스 체제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다. 1986년 2월 대선 결과를 조작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면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등을 돌렸다. 결국 마르코스는 니노이 아키노의 부인이자 대선 경쟁자였던 코라손 아키노에게 대통령직을 내주고 가족과 하와이로 망명했다. ‘피플파워’로 알려진 필리핀 민주화 항쟁은 이듬해 한국 민주화 항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마르코스 축출 후 부인 이멜다가 소장하던 3000켤레의 구두가 언론에 공개되는 등 사치와 부패상이 잇따라 폭로되면서 마르코스 가문은 전 세계에서 부패한 권력자를 상징하는 이름이 됐다.

그랬던 마르코스 가문이 다시 필리핀에서 권력을 잡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것은 소수의 정치 명문가들이 쥐락펴락해온 필리핀 특유의 정치 풍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마르코스의 정적이었던 코라손 아키노가 모자(母子) 대통령을 지내는 등 역대 필리핀 대통령 네 명이 혈연 지간이다. 마르코스의 두 살 위 누나인 이미 마르코스도 현직 상원의원이고, 어머니 이멜다도 2019년까지 상원의원을 지냈다.

마르코스 주니어는 스물여섯 살이던 1983년 필리핀 북부의 가문의 연고지 일로코스노르테주 주지사에 취임하며 일찌감치 후계자로 주목받았다. 1986년 축출된 부모와 함께 하와이로 건너가 도피 생활을 하다 1989년 마르코스 사망 뒤 당시 코라손 아키노 정권의 귀국 허용 조치로 돌아와 정치를 재개, 상원·하원의원을 역임하며 정치 경력을 쌓았다. 두테르테 현 대통령이 승리했던 2016년 선거에서는 부통령에 출마했다가 간발의 차이로 낙선할 정도로 유력 주자로 떠올랐다.

마르코스 주니어는 가문 연고지 일로코스노르테 지역의 확고한 지지 기반을 바탕으로 민주화 이후에도 경제난과 사회적 혼란이 지속돼 이반(離反)한 민심을 적극 공략하고 있다. 아버지의 철권 통치를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과 소셜미디어 등으로 활발히 소통하는 전략도 먹혀들고 있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마르코스 주니어는 아버지 시절의 철권 통치와 부정 부패와 관련, “아버지 집권 기간 나는 너무 젊었기 때문에 당시 발생한 범죄에 책임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필리핀의 인권 단체들은 마르코스 주니어가 과거 탈세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점을 부각하며 “납세 범죄로 유죄가 확정된 사람은 공직 선거에 출마할 수 없도록 한 법 규정에 위반된다”며 피선거권 박탈을 요구하고 있다. 필리핀 선거 당국은 지난 16일 이와 관련한 여섯 개의 청원 중 첫 번째 청원을 기각하며 마르코스 주니어의 손을 들어줬다고 로이터통신은 보도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마르코스 주니어의 출마가 필리핀이 가진 고통스러운 기억을 휘젓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