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부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내린 부분 동원령의 목표치인 30만 명을 채우기 위해 러시아 내 중앙아시아 출신 이주 노동자들을 일부는 구타와 고문 끝에 강제로 징집했다고 워싱턴포스트와 라디오 프리 유럽(RFE)이 인권 단체들과 징집된 병사 친척들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지난 15일 우크라이나와 인접한 러시아 국경도시 벨고로트의 한 훈련기지에서는 11명이 숨지는 총격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전쟁 ‘자원병’들의 훈련 중 발생했으며, 타지키스탄 출신 테러범들의 소행”이라고만 발표했다.
그러나 러시아 내 이주 노동자들의 인권을 돕는 아르메니아의 인권단체 ‘통 자호니’의 발렌티나 춥피크 대표는 “징집 대상 러시아 젊은이들이 해외로 도주하면서, 러시아군이 모병 목표치를 채우려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구타하고 성기(性器)에 전기충격을 가하는 것과 같은 고문을 가해 강제로 입대 자원서를 받아냈다”고 폭로했다. 그는 이 단체에도 “체포ㆍ감금된 채 강요에 의해서, 또는 속아서 입대 서류에 서명했다는 민원이 매일 170통 이상 접수된다”고 RFE에 말했다.
벨고로트 훈련기지 총격 사건의 ‘테러범’ 2명 중 한 명으로 지목됐던 에흐손 아민조다(24)도 모스크바에서 벽돌공으로 일하던 타지키스탄 출신 이주 노동자였다. 그의 형은 RFE에 “내 동생은 테러와는 전혀 무관하다”며 “10월10일 친구를 만나려고 모스크바 남동부의 한 지하철역으로 나갔는데, 10월15일 훈련 기지의 테러범으로 보도됐다”고 말했다. 형은 “동생은 이달 중 고국으로 돌아가 결혼할 계획이었다”고 말했다.
인권 단체들은 러시아 국적도 아닌 중앙아시아 출신 노동자들이 우크라이나에서 불과 40㎞ 떨어진 벨고로트 훈련기지에 있는 것 자체가 이들 노동자에 대한 만연한 인권 유린을 드러낸다고 비판했다.
물론 일부 외국인 노동자는 러시아 국적을 신속하게 취득하려고, 1년 간의 복무 계약에 서명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병역 의무도 없는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구타와 감금, 고문 끝에 또는 불법적으로 발급된 징집 명령서에 속아서 징집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40쪽이 넘는 서류에 서명하게 하면서, 입대 지원서를 슬쩍 끼워 넣는 식이다.
워싱턴포스트는 벨고로트 훈련기지의 ‘테러범’들이 친지와 갑자기 소식이 끊긴 시점은 러시아 정부가 모병 목표를 채우려고 일반 사무실과 숙박시설을 급습하고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마구 잡아들이던 때와 일치한다고 전했다.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은 지난 29일 “모병 목표를 채웠으며, 8만 명을 전선에 배치했다”고 발표했다.
우크라이나 소셜미디어에는 포로로 붙잡힌 러시아군 병사 중에서 자신들은 노동 허가 서류가 없이 일하다가 체포돼 전선에 끌려왔다고 증언하는 영상이 종종 뜬다.
15년 째 러시아에서 일하는 35세의 우즈베키스탄인은 워싱턴포스트에 “이주민센터를 방문했을 때에 강제로 내 여권에 표시를 하고 지문을 찍게 한 뒤에 ‘방금 복무 서명을 한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징집을 거부하고 경찰에 체포돼 협박을 받다가 석방됐으며, “외국 땅에서 외국인을 위해서 싸울 생각은 전혀 없다. 곧 러시아를 떠나려고 한다”고 말했다.
◇러시아 독립 언론 매체 텔레그램 “훈련소에서 ‘알라는 나약하다’고 격분시켜”
러시아 정부는 벨고로트 훈련기지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을 전혀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러시아의 독립적인 저널리즘을 추구하는 프로젝트인 ‘아스트라’는 텔레그램 메시지에서 당시 현장에 있었던 러시아 병사 인터뷰를 통해 “당시 아제르바이잔ㆍ다게스탄ㆍ아디게야 공화국 출신 이주 노동자들이 ‘이건 우리 전쟁이 아니다’며 훈련 및 참전 거부 탄원서를 쓰려고 하자, 훈련소 중령이 ‘이건 성전(聖戰)’ ‘충성을 맹세한 나라를 위해 싸우지 않는다면, 알라(Allah)는 나약하다’고 말해 이슬람 국가 출신 노동자들을 격분 시켰다”고 전했다.
이후 잠잠해진 것 같았으나, 1시간 반 뒤 사격 훈련이 시작하자 타지키스탄 출신 징집자들이 기관총으로 문제의 발언을 한 러시아군 중령을 비롯해 모두 30명을 사살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