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한국에서 서쪽으로 180㎞ 떨어진 중국 산둥반도 끝, 룽청(榮成) 스다오완(石島灣) 원전 단지. 200㎿급 초고온가스로(VHTR)에 처음으로 연료가 장착됐다. VHTR은 멜트다운(원전 노심이 녹는 것) 위험이 적은 4세대 원전 기술이다. 미국, 독일, 일본 등이 연구용으로 운영한 적이 있지만 상업용에 가까운 실물 원자로는 중국이 맨 먼저 지었다. 중국핵공업그룹은 “4세대 원전 기술에서 중요한 한걸음을 내딛게 됐다”며 “올해 말 전기를 생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문재인 정부 들어 한국이 월성 원자로 1호기를 조기 폐쇄하며 탈원전의 길로 나가는 동안 중국 곳곳에선 ‘원전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달 중국 남부 하이난성 창장(昌江)에서는 세계 최초의 상업용 육상 소형 모듈 원전(SMR)인 링룽 1호 건설 공사가 시작됐다. 중국이 자체 개발한 ACP100 원자로가 적용됐다. 중국과학원이 서부 간쑤성 우웨이(武威)에 짓고 있는 토륨 용융염 원자로(TMSR)도 다음 달 가동될 것으로 알려졌다. 물 없이 원자로를 냉각할 수 있는 게 특징이다. 아직은 연구용(2㎿급)이지만 상업화될 경우 사막 등 물이 귀한 내륙 지역에도 원전을 지을 수 있게 된다.
2060년까지 탄소 중립을 달성하겠다고 밝힌 중국은 첨단 원전 건설과 개발에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지난 4월 중국 원자력 업계가 발표한 백서에 따르면 중국은 작년 연말 기준 원전 48기를 가동 중이고 17기를 건설하고 있다. 지난 5년(2016~2020년) 동안에만 새 원전 20기가 상업 운영에 들어갔고 11기를 짓기 시작했다. 2050년 탄소 중립을 달성하겠다는 한국 정부가 탈원전을 채택하는 것과 대비된다.
2010년부터 10년간 신형 원전 기술 개발에 매달린 중국은 올 들어 실제 원전을 짓고 가동하는 실증 사업에 나서고 있다. 9월 가동에 들어갈 것으로 알려진 TMSR도 그 중 하나다. 우라늄 대신 토륨을 연료로 하고 물 대신 용융염(액체 상태 소금)을 이용해 원자로를 식힌다. 원리는 60년 전 미국에서 나왔지만 초고압을 견뎌야 하는 등 설비가 까다로워 실용화가 미뤄져 왔다.
중국과학원 상하이응용물리연구원 옌루이(嚴睿) 박사 연구팀은 최근 중국 학회지에 100㎿급 원자로 개념 설계를 담은 논문을 발표하고 “TMSR은 물 없이 (원자로) 냉각이 가능해 가뭄에 적합하다”며 “(물이 귀한) 중국 중서부 지역에 지으면 10만명에게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고 했다.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중국에 풍부한 토륨을 원료로 하고, 발전 후에도 핵무기로 전용할 수 있는 폐기물이 적어 핵 확산 우려가 적다”며 “아프리카 내륙, 중앙아시아 등 일대일로(육·해상 실크로드) 국가에 수출도 가능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소형 원전 분야에서도 중국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달 15일 중국 남부 하이난에서 건설을 시작한 중국 첫 SMR 링룽 1호의 경우 52만6000가구에 전력⋅온수⋅증기 등을 공급할 것으로 기대된다. 대형 원전보다 경제성은 떨어지지만 공장에서 제품을 찍어내듯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건설 기간도 짧다. 육지뿐만 아니라 섬, 선박 위에도 건설할 수 있다.
링룽 1호 프로젝트에 참여한 류청민(劉承敏) 중국원자력연구설계원 부원장은 중국 계면신문 인터뷰에서 “공단에 건설해 전기와 증기를 공급하거나 섬의 해수담수화 시설, 바다 위 석유 채굴 현장 등 다양한 상황에 활용할 수 있다”며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태국 등이 소형 원자로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중국이 원전 기술 개발에 매달리는 것은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뒤늦게 원전을 지은 중국은 그간 핵심 기술을 미국이나 프랑스에 의존해왔다. 서균렬 서울대 원자력핵공학과 명예교수는 23일 본지에 “기존 우라늄 원자로에서 중국은 세계 2~3등밖에 안 되지만 토륨 원자로 등 신형 원자로에서는 세계를 선도할 가능성이 있다”며 " 미국이 만들어 놓은 원자력 규제에서 벗어나 미래 원전 시장을 접수하겠다는 의지가 표명된 것”이라고 했다. 서 교수는 “공학자가 보기에 매우 위협적인 상황”이라며 “과거에는 중국이 우라늄 원자로 기술을 배우러 한국에 왔지만 이제는 우리가 중국에 기술을 배우러 가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