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임시정부를 수립한 다음 날인 8일 아프간 인접 6국이 화상 회의를 열고 아프간 문제를 논의했다. 회의 주최는 파키스탄이 맡았지만, 이번 회의장 주역은 중국이었다. 중국은 이날 회의를 사실상 이끌어가며 아프간에 2억위안(약 360억원)의 식량·약품·월동(越冬) 물자를 지원하고 코로나 백신 300만회분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미군의 아프간 철수가 완료되자 중국이 중앙아시아의 맹주로 나서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 외교부에 따르면 왕이(王毅) 외교부장은 이날 파키스탄, 이란,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외교장관, 투르크메니스탄 외교차관과 화상 회의를 열었다. 중국은 그간 러시아가 포함된 상하이협력기구, 중국·파키스탄·아프간 3국 협의체 등을 통해 아프간 문제를 논의해왔지만 주변 6국이 함께하는 회의는 처음이다.
왕이 부장은 이날 “미국과 그 동맹들은 아프간 문제의 원흉”이라고 했다. “20년 동안 아프간 내 테러 세력을 제거하지 못해 (테러 세력이) 오히려 증가했고, 아프간 국민은 가난과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테러 대응, 마약 통제, 난민 문제 등에서 주변국들의 협력을 강조했다.
지금까지 중국 당국은 탈레반에 대해 유화적 태도를 보이면서도 아프간에 대한 직접 개입에는 거리를 둬왔다. 이날 회의에서도 왕이 부장은 “어제 아프간 탈레반이 (정식 정부가 아닌) 임시정부를 선포한 것은 그만큼 아프간의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증거”라고 했다. 또 탈레반 측에 다른 파벌·부족과의 협력을 강화해 ‘포용적 정부’를 구성하고 테러조직과 분명한 선을 그으라고 거듭 강조했다. 과거 탈레반은 중국 신장위구르 분리 독립 단체인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운동(ETIM)에 훈련기지를 제공한 적이 있다. 왕 부장은 “아프간에 있는 일부 국제 테러리스트들이 주변국으로 침투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프간 정세가 안정되는 대로 중국이 아프간에 대해 본격적인 투자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중국은 2019년 기준으로 파키스탄, 이란에 이어 아프간의 셋째 무역 파트너다. 중국 국영기업들은 아프간 최대 구리 광산인 아이나크 광산에 대해 30년간 탐사·채굴권을 확보하고 있지만 아프간 정세 불안 등으로 개발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탈레반은 지난달 수도 카불을 장악한 후 중국의 투자를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히며 “중국의 일대일로(육·해상 실크로드)에 참여하고 싶다”고 했다. 중국은 이에 대해 아직 명확한 환영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왕 부장은 이날 회의에서 “중국과 아프간 사이의 화물 열차 재개 문제를 적극적으로 연구하길 원한다”고 사실상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아프간에 대한 중국의 적극적 행보에 가장 긴장한 나라는 중국의 라이벌인 인도다. 인도는 탈레반과 상대적으로 긴장 관계인 데다 탈레반에 축출된 기존 아프간 정부와 TAPI 가스관 건설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추진해왔기 때문이다. TAPI는 투르크메니스탄의 천연가스를 아프간, 파키스탄을 거쳐 인도로 들여오는 가스관인데 2018년 아프간 건설 구간에 대한 무장 단체의 공격으로 공사가 지연됐다. 인도 일간지 ‘더타임스 오브 인디아’는 지난 5일 전직 외교관들을 인용해 “(아프간 문제를 놓고) 중국과 파키스탄이 동맹을 강화하는 것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인도 매체들은 미군이 철수한 아프간의 바그람 공군기지를 중국이 활용해 인도에 대해 견제에 나설 가능성도 우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