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일 중국에서 개봉한 영화 '장진호'의 한 장면.

중국공산당 100주년을 기념해 중국 영화계가 만든 6·25 영화 ‘장진호(長津湖)’를 개봉 첫날인 지난 30일 베이징의 한 극장에서 봤다. ‘패왕별희’를 만든 첸카이거(陳凱歌), ‘황비홍’ 시리즈의 쉬커(徐克), 액션 영화 전문인 린차오셴(林超贤) 등 유명 감독 3명이 함께 메가폰을 잡았다. 중국 영화 사상 최대 제작비(2300억원)와 최대 인원(1만2000명)이 투입됐다.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중국의 애국주의 영화 ‘장진호’ 포스터. /조선DB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대 제1사단 등 연합군 1만5000여명이 함경남도 장진호 일대에 매복한 중국군 8만5000명의 포위 공격을 뚫고 흥남으로 퇴각한 전투다. 17일간 중국군의 공세를 막아내며 철수한 덕에 미군은 병력을 보전할 수 있었고, 민간인 10만명이 피란할 수 있었다.

영화는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그해 12월 흥남철수를 다뤘다. 예상대로 6·25를 미국에 맞선 ‘정의의 전쟁’으로 보는 중국 공산당의 역사관을 반복했다. 국군이나 북한군은 배제한 채 철저히 미·중 대결을 강조했다.

스크린에는 연합군 탱크와 비행기가 38선을 넘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나왔다. 미군 폭격기는 장난처럼 압록강에 떠 있는 중국 어부의 작은 목선을 폭격한다. 마오쩌둥(毛澤東) 중국 국가주석은 “미군이 38선도 넘었는데 압록강도 안 넘겠느냐”며 참전을 정당화한다. 6·25가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됐고 당시 유엔군의 38선 이북 진격은 미국의 단독 행동이 아닌 유엔 총회의 결의에 따라 이뤄졌다는 역사적 사실은 언급되지 않았다.

영화에서 특히 강조된 인물은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이었다. 마오안잉은 펑더화이(彭德懷) 중국군 사령관의 비서 겸 통역으로 6·25에 참전했다가 34일 만에 사망했다. 영화 속 마오안잉은 지친 병사들에게 솜옷을 나눠주고 자기 펜을 빌려준다. 미군 공격을 피해 동굴로 대피하다가 “지도를 가져오겠다”며 기관총탄이 빗발치는 지휘소로 돌아갔다가 폭격으로 사망한다. 중국 당국은 지난 7월 “마오안잉이 불을 피워 계란 볶음밥을 하다 미군에 발각돼 폭사했다는 인터넷 주장은 헛소문”이라고 공식 반박했다.

1950년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오른쪽). /조선DB

상영시간 176분짜리 영화는 “(장진호 전투는) 전쟁 최종 승리의 토대를 닦았다”며 “위대한 항미원조(미국에 대항해 북한을 돕는다는 6·25의 중국식 표현) 정신은 더욱 새로워진다”는 자막으로 끝난다. 한 관람객은 “기존 전쟁 영화보다 그래픽도 어색하고 전투 장면도 덜 사실적이었다”며 “의용군(중국군) 병사가 눈을 뜨고 총을 똑바로 든 채 얼어 죽은 장면은 과장이 심해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여성 관객도 적지 않았다. 장(張)모씨는 “서로 목숨을 내놓는 군인들의 우정에서 눈물이 났다”고 했다.

봉황망 등에 따르면 장진호는 개봉 첫날인 30일 영화 티켓 판매액이 2억위안(367억원)을 돌파해 전쟁영화로는 역대 최고 판매 기록을 세웠다. 중앙기검관찰보 등 관영 매체는 “장진호의 항미원조 정신이 중국인들을 감동시켰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