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가 개막했다. /연합뉴스

중국 정부가 올해 경제성장률 목표치로 31년 만에 최저 수준인 5.5%를 제시했다. 리커창 중국 국무원 총리는 지난 5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한국의 국회와 비슷한 기관) 개막식 업무 보고에서 올해 국내총생산(GDP) 증가율 목표치가 ‘5.5% 안팎’이라고 밝혔다. 작년에 목표치로 ‘6% 이상’을 제시한 뒤 실제 8.1% 성장을 달성한 것보다 눈에 띄게 하향 조정한 것이다. 천안문 사태로 서방의 제재를 받은 직후인 1991년 4.5% 이후 가장 낮은 목표치다.

리 총리는 이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비롯해 3000명 가까운 전인대 대표들 앞에서 중국이 직면한 위기를 강조했다. 올해 경제에 대해 “국내외 정세를 종합적으로 판단할 때 우리가 발전 과정에서 직면할 위험과 도전은 현저히 많아질 것”이라고 했다. 작년 업무 보고 때 “여전히 적지 않은 위험과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경제가 장기적으로 호조를 보이는 토대는 변하지 않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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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총리는 A4 30쪽짜리 업무 보고에서 중국 경제가 직면한 어려움을 길게 나열했다. 그는 “전 세계 전염병(코로나)이 계속되고 있고, 세계 경제의 회복 동력이 부족하고 상품 가격이 크게 변동하며 외부 환경이 복잡하고 엄중하다”며 “우리 경제의 발전은 수요 축소, 공급 충격, 장기 (성장) 약세라는 3중 압력에 처해있다”고 했다.

그는 중국 내 일부 지역에서 코로나가 재발하는 것을 언급하며 “소비와 투자 회복세가 지연되고 수출 관련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 에너지 원자재 공급이 여전히 빠듯하고 중소기업과 자영업은 생산, 경영난을 겪고, 고용 안정도 매우 어려운 과제로 대두했다”고 했다. 베이징의 외교 소식통은 “고용 등 민생 전반에 걸쳐 중국 경제가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 연설이었다”고 했다.

중국이 이같이 공개적으로 위기를 강조하고 나선 것은 시진핑 주석 체제를 중심으로 불확실성 극복과 단결을 촉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 일반 국민이 느끼는 체감 경기가 당국이 발표해온 통계보다 훨씬 나빠 이를 뒤늦게 인정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중국은 인구 증가세가 사실상 멈추면서 내수 확대가 한계에 도달한 데다, 지난해부터 두드러진 글로벌 공급망 병목 현상으로 원자재 수입 가격이 대폭 올라 고전하고 있다. 또 2년 넘게 ‘제로 코로나’ 정책을 고집해 외식업·숙박업도 큰 타격을 입고 있다. 여기에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증폭된 상황이다.

중국 정부가 제시한 ‘5.5% 내외’ 성장률 목표치는 금융 기관들의 예상보다는 높은 수준이다. 지난 1월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중국 경제성장률을 5.6%에서 4.8%로 하향 조정했고, 글로벌 투자은행들도 4%대를 예상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후한 평가를 하는 중국의 증권사나 연구 기관들도 5~5.3%로 전망해왔다. 이 때문에 이번 발표는 중국 당국이 5%대 성장률을 반드시 사수하겠다는 각오를 대내외에 밝힌 것으로도 해석된다.

업무 보고에서는 시진핑 주석의 해외 진출 프로젝트인 일대일로(육·해상 실크로드)에 대해서도 “대외 투자 협력을 질서 있게 전개하고 해외 위험을 효과적으로 대비하겠다”고 했다. 일대일로의 질과 효율을 높이겠다는 기존의 입장에서 나아가 협력국의 채무불이행 위험 등에 대비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중국 지도부는 올가을 시진핑 주석의 3연임을 확정하는 20차 당대회를 앞두고 있어 개혁보다는 안정 위주의 민심 달래기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 정부는 올해 정부 지출을 작년보다 2조위안(약 385조원) 이상 확대하고, 중소기업, 자영업자, 구직자 등에 대한 대책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이번 중국 정부 업무 보고에 대해 6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외부 리스크가 커지는 상황에서 조심스럽고 내부 지향적이었다”고 평가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올해 국방 예산을 작년 대비 7.1% 증액한 1조4504억위안(약 279조4000억원)으로 책정했다. 중국 국방 예산은 지난 2019년 전년 대비 7.5% 인상됐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가 시작된 후인 2020년과 2021년에는 각각 전년 대비 6.6%, 6.8% 증액에 그쳤는데 3년 만에 증액 폭이 7%대를 회복했다. 대만에 대한 군사적 압박과 미국과의 군사 경쟁에 대비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