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일 중국 베이징 서비스무역박람회장에 중국 반도체 회사 룽신(龍芯)의 제품이 전시돼 있다.

미국이 첨단 반도체와 관련 장비의 중국 수출을 사실상 전면 금지하는 수출 통제 조치를 잇달아 발표하자 중국이 ‘반도체 자립’을 위한 속도전에 돌입했다. 이달 중국 공산당의 20차 당대회가 끝나면 국가 차원의 대규모 지원 체제도 출범시킬 전망이다.

중국의 ‘실리콘 밸리’로 불리는 광둥성 선전시는 지난 8일 반도체 산업 발전 계획안을 발표했다. 선전에 위치한 반도체 기업이 생산 라인을 개조할 때 설비당 최대 15억위안(약 3000억원)의 보조금을 주고, 전기와 물 사용료를 각각 60%, 50%씩 지원하는 내용이다. 첨단 반도체 설계 기업에 연간 1000만위안(약 20억원) 연구비를 지원하는 등의 분야별 세부 지원 금액도 공개했다. 선전시는 “CPU(중앙처리장치), GPU(그래픽 카드), 인공지능 등 핵심 첨단 반도체 제품에서 (기술적) 돌파를 이뤄야 한다”고 했다.

선전시의 반도체 진흥 계획은 미국이 중국에 대한 첨단 반도체, 장비 수출을 금지하기로 발표한 직후 나왔다. 미국 상무부는 7일(현지 시각) 중국 반도체 메모리칩 생산 업체인 YMTC(長江存儲)를 비롯해 31개 중국 기업·단체를 수출 통제 대상으로 지정하는 내용의 대중 반도체 규제 정책을 발표했다. 18nm(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 14nm 이하 로직칩을 생산하는 중국 기업에 기술 및 장비를 판매하려는 미국 기업들은 정부의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사실상 대중 수출을 봉쇄한 것이다.

중국 상무부는 10일 대변인 명의로 “미중 기업 간 정상적인 거래를 심각하게 방해하고 국제 공급망 안정을 위협하는 것으로 단호하게 반대한다”고 했다. 대만 중앙통신사는 “중국 반도체 기업은 28nm 수준의 구형 공정이 대부분이고 중국 1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기업)인 SMIC(中芯國際)의 14nm 공정도 실험 단계라 당장 중국 반도체 생산에 치명적 영향은 없겠지만, 선진 기술 도입에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고 했다. 미국의 반도체 규제 속도가 빨라지자 중국 공산당은 지난 9월 ‘핵심 기술 개발을 위한 새로운 거국적 체제’를 신설하기로 결정했다. 정부와 기업, 학계를 망라한 반도체 연구, 생산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뜻이다.

중국은 그간 반도체 대외 의존을 ‘목 졸림’이라고 부르며 국산화를 추진해 왔다. 국가 반도체 산업 투자 펀드를 조성하고, 반도체 기업에 대해 법인세를 면제해 준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반도체 붐’에 따라 지방정부들이 앞다퉈 투자했던 프로젝트들이 좌초하면서 중국 반도체 자립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이 커졌다. 인재 부족도 지적됐다. 그간 중국 반도체 산업은 미국, 대만 출신 등 ‘시장파’와 학계 출신인 ‘학원파’가 이끌어왔는데 미국·대만과 갈등이 심해지면서 해외로부터 인재 영입, 투자 유치가 쉽지 않은 상황인 데다가 학원파 역시 변하는 시장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평가도 있다. 최근 국제 반도체 경기가 하락 추세여서 투자 유치가 쉽지 않다는 점도 악재다.

첨단 반도체 분야에서 획기적 돌파를 이루기 어려운 상황에서 중국이 ‘참호전’을 벌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세계 최대 반도체 소비 시장’이라는 자국의 이점을 이용해 빅데이터, 인공지능 기술을 시장화하고 여기서 발생한 반도체 수요로 설비와 기술에 투자하는 선순환을 통해 자립을 추진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상대적으로 구형 반도체라도 자체 생산할 수 있는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의견도 커지고 있다. 이희옥 성균관대 교수는 최근 언론 기고에서 “(중국은) 미국이 제재할 가능성이 있는 부품과 소재를 골라내 반도체 전 공정에서 차단하는 ‘공급망 정화 작업’을 전개하는 한편 이를 대체하는 플랜B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중국 중신증권은 11일 “미국 제재는 중국 기업의 시장점유율 확대로 이어지고, 반도체 국산화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막대한 자금력을 앞세워 미국 이외 국가들의 반도체 인재와 기술을 흡수하려는 시도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 금융 당국은 최근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한국 반도체 기업체에 투자할 수 있는 상장지수펀드(ETF)를 승인했다. 최근 중국 지방 도시에 세워진 반도체 공장들에는 한국 인력 수백명이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