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올해 경제 성장률 목표치가 예상보다 낮은 5% 안팎으로 제시됐다. 리커창 중국 국무원 총리는 5일 정기 국회 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전체 회의 개막식에서 2023년 경제 성장률 목표치를 이같이 밝혔다. 이는 ‘제로 코로나’ 정책을 시행했던 작년(5.5%)보다 낮을 뿐 아니라 경제 성장률 목표를 공개하기 시작한 1994년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중국 인민일보는 “지난 5년은 물 건너고, 언덕을 오르고, 난관을 넘는 어려움이 있었다”며 “(양회 기점으로) 기운을 내서 새로운 위업을 달성해야 한다”고 했다.
중국 안팎에서는 작년 12월 코로나 방역을 전면 완화한 만큼 중국이 올해 경제 성장 목표를 높일 것으로 예상했었다. 이날 오전 베이징 인민대회당 만민대례당 3층에서 양회(兩會·전국인민대표대회·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를 취재하는 외신 기자들 대부분은 중국이 최소 5% 중반대의 경제 성장률을 제시할 것으로 예측했다. 행사 직전 대만 둥선TV 기자는 카메라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중국이 올해 경제 성장률 목표를 작년보다 높은 6%로 설정할 것이 유력하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예측은 빗나가고, 중국의 고성장 시대가 사실상 종료됐음을 시사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격화되는 미·중 경쟁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에 대응하기 위해 국방 예산을 대폭 증액할 가능성도 여러 차례 제기됐지만, 올해 국방 예산 증액률도 예상보다 낮았다. 작년 증액률(7.1%)과 비슷한 7.2%로, 예산 총액은 1조5537억위안(약 293조원)이다. 코로나 이전인 2019년(7.5%)보다 0.3%포인트 낮다.
검은색 정장에 붉은색 넥타이를 맨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이날 예년 행사 때와 비교해 표정이 굳어 있었다. 시진핑은 코로나 이전인 2019년에는 등장할 때 참석자(인민대표)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날은 별다른 인사 없이 퇴장했다.
올해 양회는 시진핑 집권 3기가 당·군에 이어 정부(국무원)에서 공식 출범하는 무대인 만큼 대대적인 축하 행사로 치러질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이전에 비해 침체된 분위기에서 진행되고 있다. 코로나 이후 국가 위기 극복에 초점이 맞춰진 행사로 치러지는 것이다. 중국이 올해를 경제 회복과 국가 영향력 확대의 원년으로 삼았지만 국내외 현실이 녹록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날 리커창의 54분짜리 업무 보고의 시작 문구는 “풍고랑급(風高浪急·높은 바람과 거센 물결)의 국제 환경과 어렵고 힘겨운 국내 개혁·발전의 임무”였다. “지난 5년은 극도로 평범하지 않았다”고 여러 차례 강조하기도 했다.
리커창은 특히 중국 경제 회복이 쉽지 않을 것을 예고했다. 그는 “세계의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여전히 높고, 세계 경제와 무역 성장 동력이 약화됐다”고 했다. 또 중국이 직면한 문제로 경제 성장의 기초가 약하고, 민간 기업·부동산 시장·소규모 금융 기관·지방정부 재정 등이 불안하다고 지적했다. “중국의 과학기술 창조력이 아직 약하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중국 중신증권은 “중국이 민간·공유 경제를 동시에 잡고, 해외 자본 유치와 이용을 강화할 의지를 보여줬다”고 했다.
중국은 경제 회복에 집중하자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인지 양회 때마다 고수하던 ‘양회 블루(양회 기간 맑은 하늘)’도 포기했다. 올해 양회가 열린 4~5일 베이징의 하늘은 미세 먼지로 뿌옇게 변해 톈안먼의 마오쩌둥 초상화도 흐릿하게 보였다. 대외적으로 보여지는 중국의 이미지보다 당장의 경제 살리기가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코로나 방역에 대한 자신감도 드러내지 않았다. 이날 행사에서 시진핑을 비롯한 지도부를 제외한 2900여 명의 참가자(인민 대표)들은 모두 마스크를 착용해야 했다. 중국은 취재진뿐 아니라 전인대 대표 등 이날 행사 참석자들을 전날 베이징의 호텔에 격리한 뒤 유전자증폭(PCR) 검사를 시행했다. 개막식에 참석한 외신 기자 수는 코로나 때 열렸던 양회와 비슷하게 23명에 불과했다. 지난해 12월 코로나 방역을 전면 완화했는데도 강도 높은 방역 조치를 적용한 것이다.
미국 등 외부 위협에 대한 위기 의식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리커창은 “무역 보호주의가 고개를 들었다”, “외부 탄압과 억제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면서 외부 위협과 도전을 4차례 강조했다. 미국이 중국에 가하는 반도체 제재 등 전방위 봉쇄 압박을 겨냥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이날 리커창은 양회에서 처음으로 작년에 시진핑이 발표한 안보 이니셔티브(GSI) 문건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외부 안보 위협에 맞서 중국 스스로의 길을 찾겠다는 의미다.
최근 강도 높게 압박해온 대만에 대한 발언은 수위를 크게 낮췄다. 리커창은 “‘하나의 중국’ 원칙과 92공식을 고수하고, 단호하게 독립을 반대하고 통일을 촉진해야 하며, 양안(중국과 대만) 관계 평화 발전과 조국의 평화·통일 과정을 진전시켜야 한다”면서도 “양안 동포는 피로 연결되어 있고, 양안 경제 문화 교류·협력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대만 동포의 복지(福祉·행복과 혜택) 제도와 정책을 완비하고 늘려야 한다”고 했다. 지난해 양회 업무보고 내용과 비교하면 올해는 “외부 세력 간섭을 단호하게 반대한다”는 내용이 빠지고 “대만 동포 복지”를 강조하는 내용이 새로 포함됐다. 시진핑은 계속 박수를 치지 않고 있다가 이 내용이 나올 때만 이례적으로 두 번 연달아 박수를 쳤다.
그러나 이런 중국의 자신감 결여와 별개로 시진핑의 권력은 더욱 부각됐다. 이날 개막식에서 심의한 입법법 개정안에서는 입법의 기본 이념으로 삼아야 할 사상에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이 장쩌민·후진타오 사상과 함께 추가됐다. 기존 입법법에서는 중국 지도자 가운데 마오쩌둥·덩샤오핑의 사상만 거론했었다. 개막식 중계에서 시진핑 주석의 모습은 단독으로 여러 차례 비춘 반면 당·정 지도부는 2명을 한번에 묶어 화면에 담거나 잠깐씩만 조명했다. 지난 4일 양회의 또 다른 축인 정협의 전체회의 개막식에서는 왕양 정협 주석이 업무보고에서 시진핑의 이름을 16번이나 언급했다. 당·정 개혁을 통해 시진핑의 국정 통제력도 높일 것으로 예상된다. 국무원이 맡던 홍콩 관련 업무를 당으로 넘기고 공안·사법·대테러·방첩 등을 관장하는 당 기구를 설치하는 등 당의 국정 장악을 강화하는 조직 개혁안이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 5년 전 반대표 없이 국가 주석에 당선됐던 시진핑은 올해 양회에서도 만장일치로 재선출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