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러시아 방문 이틀째인 21일(현지 시각)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중·러 협력 확대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논의했다. 시진핑은 이날 오후 3시(한국 시각 오후 9시)에 모스크바 크렘린궁에 도착해 레드카펫을 밟고 입장했다. 푸틴은 중앙 홀에 내각 관료 전원을 이례적으로 도열시킨 후 시진핑을 맞이했다. 붉은색 계열의 넥타이와 검은색 정장을 입은 두 사람은 길게 악수를 나누고, 러시아 군악대가 연주하는 양국 국가를 들은 후 회의장으로 입장했다. 이날 회담은 정상 간 단독 회담에 이어 외교, 국방, 경제 분야 대표단이 배석하는 확대 회담으로 이어졌다. 이후 문서 서명식과 국빈 만찬을 두 정상이 함께 했다.

푸틴 향해 걸어가는 시진핑… 우크라 간 기시다 - 러시아를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1일(현지 시각) 모스크바 크렘린궁 행사장에 입장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레드 카펫 반대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두 정상은 이날 공식 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 국빈 만찬을 이어갔다. 오른쪽 사진은 이날 우크라이나를 방문해 수도 키이우 외곽에 있는 부차 마을 학살 현장을 둘러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로이터 연합뉴스·뉴스1

양국 정상은 ‘새 시대 포괄적 협력 관계 및 전략적 상호작용 심화에 대한 양국 공동성명’과 2030년까지 양국 경제협력의 핵심 분야를 발전시킬 계획 등 2개 문서에 합의했다. 또 다양한 분야의 협력 방안을 담은 10여 개 문서에도 사인했다. 러시아 타스통신은 “크렘린궁의 주된 관심사는 에너지·군사 협력과 무역이었다”라고 했다. 정상회담에 앞서 중국 외교부는 시진핑의 방러에 대해 ‘우정, 협력, 평화의 여정’이라고 발표했다.

중·러 정상이 만난 날,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전격 방문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총리가 전쟁이 벌어진 국가를 방문한 것은 처음이다. NHK 방송에 따르면 인도 방문 중이던 기시다 총리는 이날 오후 일정대로 귀국하지 않고, 폴란드로 간 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처럼 미사일 공격을 받는 우크라이나 상공을 피해 육로로 키이우에 들어갔다. 기시다 총리는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부차 마을을 둘러본 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싸고 미국의 동맹국인 일본과 미국의 봉쇄에 맞선 중국의 행보가 선명하게 갈린 것이다.

시진핑의 이번 방러는 중·러 관계가 또 한 번 격상되고 세계가 신냉전 체제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시진핑은 이달 초 국가주석 3연임을 확정한 이후 첫 해외 방문지로 러시아를 택했고, 중·러는 최근 연합 군사훈련과 교역 규모를 늘리고 있다.

중·러가 반미(反美) 연합을 강화하는 가운데 시진핑은 푸틴의 ‘권좌 유지’를 지지하는 듯한 발언도 했다. 21일 중국 외교부에 따르면 시진핑은 전날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푸틴 대통령에게 “러시아는 내년에 대통령 선거를 거행한다”며 “나는 러시아 인민이 반드시 당신에게 계속 견고한 지지를 보낼 것으로 굳게 믿는다”고 했다. 또한 시진핑은 미하일 미슈스틴 러시아 총리와 만난 자리에서 “어제 푸틴 대통령에게 연내 편한 때 중국을 방문하도록 공식 초청했다”고 밝혔다. 시진핑은 지난 10년간 40회 이상 푸틴을 만나며 관계를 돈독히 해 왔는데, 이 같은 발언을 통해 서방의 제재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지지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시진핑은 ‘피스메이커’를 자처하며 방러를 계기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중재할 뜻을 밝혔지만, 오히려 세계의 진영 대립을 가속화함으로써 우크라이나 전쟁이 계속되도록 만든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미국이 만든 질서에도 적극 맞서고 있다. 중국은 앞서 우크라이나 전쟁 1주년을 맞은 지난달 24일 ‘우크라이나 위기의 정치적 해결에 관한 중국의 입장’을 발표하며 중국식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이 문건은 각국의 주권 존중, 일방적 제재 중단 등 12가지 내용으로 구성됐지만 ‘러시아의 점령지 철수’ 등의 요구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날 중·러 정상회담에서도 시진핑은 중국의 우크라이나 전쟁 해법을 설명하고, 푸틴의 협조를 구했다. 푸틴은 앞서 시진핑에게 “우크라이나의 심각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중국의 제안을 주의 깊게 검토했다”며 “우리는 중국의 계획을 존중한다”고 했다.

중국의 중재 노력은 중국이 세계에서 미국의 경찰 국가 역할을 대체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여주는 선전일 가능성이 크다. 강준영 한국외대 교수는 “수사학적으로 중국이 중재에 나선다고 선언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중국의 중재안이 실효성이 있다고 할 수 없지만, 미국이 방기하는 상황에서 중국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를 보이면 국제사회에서 이미지가 좋아질 것을 기대한다”고 했다. 실제로 중국 외교부는 시진핑 방러의 세 가지 키워드로 ‘우정, 협력, 평화’를 제시하며 ‘우정’을 ‘협력’ 앞에 언급했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21일 자국 전문가들을 인용해 “시진핑의 방러는 우크라이나 사태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희망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러시아는 전쟁 이후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상황이라 중국과의 관계 강화가 절실해 시진핑에게 매달리고 있다. 러시아는 중국의 직접적인 군사 무기·물자 지원, 자국 석유 등 에너지 대량 구매, 러시아에 유리한 입장 표명 등을 원하고 있다. 시진핑 방러 첫날인 전날에는 시진핑과 푸틴이 4시간 동안 비공식 회담을 했다. 이날 두 정상은 1m 거리에서 마주 앉아 편안하게 대화했다. 지난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사무총장 등 정상이 방문했을 때 푸틴은 5m 길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대화했다. 시진핑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 푸틴이 이례적으로 길가까지 나와 배웅했다고 한다.

이태림 국립외교원 교수는 “대미 전선에서의 러시아의 하드파워, 군사외교력은 중국에 있어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라며 “러시아가 경제적으로 몰락하거나 군사적으로 패배하는 것은 중국에도 굉장히 좋지 않은 상황”이라고 했다. 러시아가 장기전으로 인해 국력을 소진할 경우 ‘순망치한’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표나리 국립외교원 교수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중국의 대러 수출액은 30% 증가했고, 그중 제재를 받고 있는 전자기기와 자동차가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한다”고 했다. 뉴욕타임스(NYT)는 21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난해부터 중국이 러시아에 1200만달러(약 157억원) 규모의 드론과 관련 부품을 수출했다고 전했다.

러시아는 중국과 관계를 강화하면서 미국과는 긴장을 높이고 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러시아 국방부는 20일 국경으로 접근하는 미 전략폭격기를 저지했다고 밝혔다. 러시아 국방부는 발트해 상공을 관할하는 서부 공군이 방공 레이더 장치로 미 공군 전폭기 2대를 식별하고, 국경 침범을 막기 위해 러시아 전투기가 긴급 이륙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