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북·중 최대 교역 거점인 랴오닝성 단둥시의 둥강(東港·현급 시). 이곳에서 만난 수산물 가공 공장의 사장 A씨는 “작년 하반기부터 북한산 수산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요즘은 공장 직원 500명이 연장 근무를 해야 할 정도로 물량이 많다”고 했다. A씨는 사진을 찍지 않는 조건으로 공장 내부 영상 5건을 보여줬다. 근로자 수백 명이 밝은 조명 아래 일렬로 서서 바지락·키조개·다슬기·문어 등을 손질하는 장면이 보였다. A씨는 “북한 원산·나주 인근 바다에서 잡은 수산물이 우리 공장을 거쳐서 한국과 미국 등으로 팔린다”면서 “요즘 한국 가공 식품에 들어가는 다슬기 중 상당수가 북한산일 것”이라고 했다.
코로나로 2020년 초 이후 멈췄던 북·중 간 경제 교류가 서서히 재개되면서 유엔 제재를 뚫은 북한산 물품이 중국에서 유통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중국으로 흘러드는 것은 북한산 수산물이다. 단둥에는 약 40곳의 수산물 가공 공장이 있는데, 이 가운데 5~6곳이 북한산 수산물을 전문적으로 취급한다고 알려졌다.
둥강의 수산물 시장에선 대북 제재 품목인 북한산 낙지·조개가 버젓이 팔리고 있었다. 둥강의 최대 수산물 시장인 ‘둥강 황하이 수산물도매시장’의 한 점포에 들어가 “북한산 해산물을 보고 싶다”고 했더니 “북한산 가리비가 요즘 싱싱해서 잘 팔린다”는 답이 돌아왔다. 인근의 또 다른 점포에서는 어망에 낙지를 4~5마리씩 담아 팔고 있었다. 원산지를 물었더니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데, 우리는 당디(當地·현지)라고 한다”면서 북한산인 것을 암시했다. 이날 시장에서 판매되는 가리비는 한 근에 5.5위안(약 1100원), 다슬기는 20위안(약 3800원), 낙지는 30위안(약 5800원)이었다.
북한의 수산물 수출은 2017년 12월 안보리 제재로 금지됐고, 중국 해관(세관)의 공식 통계에는 북한산 수산물 수입이 ‘0‘으로 표시된다. 실제로 2020년 1월 코로나 확산 이후에는 북한 수산물도 중국으로 거의 들어오지 못했다. 그러나 작년 하반기부터 북한 해역에서 잡은 수산물을 중국 배가 해상에서 넘겨 받아 ‘중국산’으로 유통하는 경우가 크게 늘었다. 수산물은 부피가 큰 석탄과 달리 운반이 용이하고, 원산지 구별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국경 개방 움직임과 함께 대북 제재의 ‘구멍’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제재 전까지 수산물은 대중(對中) 수출품 가운데 석탄·섬유에 이어 가장 규모가 컸다. 연간 1억5000만달러어치를 수출해 짭짤한 ‘외화 벌이’ 노릇을 했다.
단둥의 대형 도매 시장에서는 북한 무역상들이 적잖이 목격됐다. 19일 단둥의 대형 도매 시장인 신류 시장에서는 북한 인공기를 걸어 놓고 북한 무역상들을 대상으로 호객하는 점포들을 볼 수 있었다. 이날 의류 매장에서 만난 북한 무역상 남녀는 “자크(지퍼)가 영 별로라 5위안은 더 깎아야겠는데”라면서 중국인 주인과 가격 흥정을 하고 있었다. 맞은 편의 스포츠 용품점에서는 또 다른 북한 무역상 남녀가 탁구채 5~6개를 종류별로 펼쳐 놓고 제품 품평을 하고 있었다. 중국인 주인은 다른 손님들이 가게를 기웃거리는데도 신경 쓰지 않고 북한 무역상 대응에만 집중했다. 단둥 소식통은 “북한 무역상은 한 번에 수천위안(수십만원)짜리 거래를 하기 때문에 VIP 대접을 받는다”고 했다.
향후 중국과 북한 사이의 육로·철로 운행이 정상화되며 국경이 전면 개방되면 대북 제재 구멍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유엔 제재 대상에선 북한 관광·임가공 제품 정도만 제외돼 있다. 북한이 경제 회복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제재 품목을 중국에서 몰래 사고팔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북한이 개성공단 내 공장에 중국 자본을 끌어들이려는 정황도 포착되고 있다.
중국과 교역이 대부분 끊긴 북한의 식량난과 경제 악화는 심각해 임계치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9월 단둥~신의주 기차 운행이 재개된 것도 북한 측이 중국에 식량 등 ‘7가지 품목’을 긴급 요구했고, 북·중 고위급이 단둥에서 만난 직후에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단둥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 화교(중국 국적 북한 거주자)들은 지난 1월에도 현지 사정을 견디지 못해 50명 넘게 중국으로 넘어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