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26일 통화했다.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처음으로 직접적인 소통에 나섰다. 통화 직후 중국은 우크라이나에 특사를 보낸다고 발표했고,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2월 이후 비어 주중 대사를 임명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동안 소통이 막혔던 중국과 우크라이나가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 시점에 맞춰 관계 개선에 나서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날 중국 국영 CCTV는 시진핑과 젤렌스키의 통화 사실을 보도하며 “시 주석의 입장은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러시아와의) 협상을 권하고 대화를 촉구하는 것”이라며 “통화는 우크라이나 측 요청으로 이뤄졌다”고 전했다. 젤렌스키 또한 트위터를 통해 “시진핑 주석과 길고 의미 있는 통화를 했다”면서 “이번 통화와 주중 우크라이나 대사의 임명이 양국 관계 발전에 강력한 추진력을 더하리라 믿는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는 이날 주중 대사에 파블로 리야비킨 전 전략산업부 장관을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이 자리는 지난해 2월 전 대사가 심장마비로 급사한 이후 1년 넘게 공석이었다.
중국 외교부는 이날 리후이(李輝·70) 유라시아 특사가 우크라이나로 파견될 것이라고 밝혔다. 2009~2019년 러시아 주재 대사를 지낸 ‘러시아통’으로 이후 유라시아 특사를 맡고 있는 인물이다.
시진핑은 젤렌스키와 통화 후 중국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맡을 것임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지난 2월 중국이 우크라이나 전쟁 1년째를 맞아 정치적 해결에 대한 입장을 발표한 사실을 재차 강조하며 “우크라이나는 위기의 제조자도, 당사자도 아니다. 중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자 책임 있는 대국으로서 ‘강 건너 불구경’이나 ‘불에 기름을 얹는 짓’ 또는 기회를 틈타 이익을 얻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다만 “모든 당사자가 우크라이나 위기에서 깊이 반성하고 대화를 통해 유럽의 장기적 안정을 모색하기 바란다”며 평화를 위해선 유럽 역시 책임이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중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해서 공식적으로는 ‘중립’이라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하지만 전쟁 장기화의 책임을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등 서방의 개입 탓이라고 주장하는 러시아의 입장에 동조하고 지난달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 주석이 회동하는 등 사실상 러시아 편에 가깝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런 가운데 시진핑과 젤렌스키가 전격적인 소통에 나서면서 중국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중국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와 경제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두 나라 모두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국가이기도 하다”라고 전했다.
젤렌스키는 그간 러시아의 우방인 중국과의 대화를 끊임없이 요구해왔다. 중국이 러시아 편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임에도 중국만이 러시아의 입장을 바꿀 수 있다는 분석이 꾸준히 나왔기 때문이다. 당초 지난달 21일(현지 시각) 시진핑이 러시아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회담을 가진 후 젤렌스키와 화상통화를 할 것이란 관측이 나왔으나 중국 측이 입장이 명확히 정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미루면서 양측의 소통은 무산됐다. 이후에도 젤렌스키는 시진핑과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며 우크라이나 키이우에 초청하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지만 중국 측은 “적절할 때 이야기하겠다”며 소통을 미뤄왔다.
시진핑이 그동안의 입장에서 선회할 조짐을 보이면서 ‘춘계 대공세’를 예고하며 긴장감이 감돌았던 전쟁의 양상이 변할지 또한 주목된다. 앞서 키릴로 부다노우 우크라이나 국방부 군사정보국장은 24일 자국 언론 인터뷰에서 “근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며 대반격 계획을 언급했었다.
한편에선 중국이 중재자 역할을 자청하고 나선 것이 미국을 중심으로 서방의 반중 분위기가 고조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주펑 난징대 교수는 NYT에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중국과 우크라이나의 경제적 관계는 (러시아에 비해) 와해된 상황”이라고 했다. 중국이 겉으로는 ‘공평한 중재자’임을 내세우더라도, 결국은 미국과 대립하는 구도 아래 경제적으로 더 밀접한 러시아 쪽 입장을 대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