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외교 사령탑으로는 5년 만에 중국을 찾은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19일 오후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났다. 시진핑은 미·중이 블링컨 방중으로 일부 합의를 달성했다며 “매우 좋은 일”이라고 했다.
중국 국영 CCTV가 공개한 영상에서 시진핑은 블링컨에게 “(중국 외교 사령탑인) 왕이 주임, 친강 국무위원(외교부장)과 긴 시간 회담을 한 것으로 안다”면서 “전반적으로 솔직하고 심도 있는 논의를 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중국은 입장을 표명했다”면서 “양측은 발리 회담(작년 11월)에서 합의했던 것을 이행하기로 합의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중이) 일부 구체적인 문제에서 진전을 이루고, 합의를 달성했다. 이건 매우 좋은 일”이라고 했다. 또 “국가 간의 교류는 상호 존중하고 성의로 대해야 한다”면서 “국무장관 선생의 이번 방중이 중미 관계 안정화에 긍정적 작용을 하길 희망한다”고 했다. 중국 외교부에 따르면 시진핑은 이 자리에서 “미국과 충돌하고 대립하는 것을 원치 않고, 평화 공존과 우호 협력을 기대한다”며 “중국은 미국의 이익을 존중하며, 미국에 도전하거나 미국을 대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진핑의 이 같은 발언은 빠르게 악화되는 미·중 관계의 고삐를 블링컨 방중을 계기로 다시 잡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양국이 주요 현안에서 여전한 입장 차를 확인했지만,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한 관리 단계에 돌입했다는 것이다. 이날 시진핑은 긴 테이블을 양쪽에 놓고 상석에 앉아 회의를 주재하듯 회동을 진행했다. 두 테이블에는 각각 블링컨 일행과 친강 외교부장(장관) 등 중국 인사들이 앉아 있었고, 시진핑과 블링컨을 제외한 이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앞서 이날 오전 블링컨은 중국 외교 정책을 지휘하는 왕이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에서 만났다. 왕이는 블링컨에게 “중·미가 대화할 것인지 대항할 것인지, 협력할 것인지 충돌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고 했고, 블링컨은 작년 11월 인도네시아 발리 G20 정상회의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만났을 때의 관계로 돌아가자고 했다.
왕이는 “중미 관계는 중대 고비[關鍵節點]를 맞고 있다”면서 “역사에서 후진을 해봐야 출로(出路)가 없고, 뒤엎고 다시 시작하는 것은 더욱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양국 관계는 저점에 빠졌고, 근본 원인은 미국의 잘못된 대중 인식이 그릇된 대중 정책을 낳았기 때문”이라면서 “미국 측은 반드시 깊이 반성[反思]하고, 중국과 함께 이견을 관리해야 한다”고 했다.
왕이는 미국이 중국의 과학기술 발전을 가로막고, 중국 내정에 간섭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고 했다. 대만 문제와 관련해서는 “국가 통일을 수호하는 것은 중국의 핵심 이익 중에 핵심으로, 중화(中華) 자녀들의 운명이 연결된 중국 공산당의 굳건한 역사 사명”이라면서 “중국은 조금도 물러서거나 타협할 여지를 남길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블링컨은 “미국이 작년 11월 발리에서 양국 정상이 만나 확정한 의제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블링컨은 전날인 18일에는 친강 중국 외교부장과 만나 7시간 30분 동안 마라톤 협의를 했다. 친강은 회담에서 “현재 중·미 관계는 수교 이래 최저점에 이르렀다”며 양국 관계를 정상 궤도로 되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친강은 “대만 문제가 중·미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자 가장 대표적[突出]인 위험”이라고 했다. 이에 블링컨은 “오해와 오판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외교와 폭넓은 현안에 대한 소통 채널을 열어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어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규범에 기반한 국제 질서를 유지하는 세상을 위한 비전을 진전시키기 위해 동맹과 파트너와 협력할 것”이라고 했다. 블링컨은 친강을 워싱턴DC로 초청하기도 했다.
왕이와 친강은 블링컨과의 만남에서 양국 관계의 해법으로 ‘시진핑표 외교 구상’을 내세웠다. 왕이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2013년 제시한 ‘신형대국관계’를 언급하며 “미국은 거울을 보듯 ‘국가가 강해지면 반드시 패권을 추구한다’는 프레임워크로 중국을 바라보지 말고, 서방 전통 대국이 걸어온 궤적에 근거해 중국을 오판하지 말라”면서 “이것이 미국의 대중 정책이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핵심”이라고 했다. 친강도 마찬가지로 “중국의 대미 정책은 상호존중, 평화공존, 협력호혜 원칙을 따른다”고 했다. 신형대국관계는 미국과 중국이 대립하지 말고 서로의 ‘핵심적 이익’을 존중하며 ‘윈윈 관계’를 구축하자는 내용이다.
양국 관계를 개선시킬 획기적인 발표나 합의는 나오지 않았지만, 외교 전문가들은 블링컨의 방중은 미·중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것을 막는다는 점에서 작지 않은 의미가 있다고 진단한다. 미국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양국 관계가 중국이 ‘최저점’이라고 표현한 불화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우신보 푸단대 국제문제연구원 원장은 “이번 블링컨 방중으로 양국 관계의 해빙은 어렵고, 교착 상태를 끝내는 의미는 있다”고 했다.
양측은 이번 만남에서 고위급 소통 복원과 가드레일 설정을 논의하고, 교류 확대를 합의하기도 했다. 양국 인문 교육 교류를 장려·확대하고, 학생·학자·기업인의 상대국 방문을 지지하고 편리를 제공하기로 했다고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전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국무부 고위 당국자를 인용해 “(양측은) 미·중을 오가는 항공편 수를 늘리는 데 함께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전했다.
미·중 정상회담도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WSJ는 “중국 관리들에게 올해 최우선 과제는 시진핑 주석이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해 바이든 대통령과도 별도의 회담을 갖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중국 측은 이번 블링컨의 방중을 미국이 중국에 손을 내미는 것처럼 보이도록 연출하기 위해 애를 썼다. 블링컨 장관이 비행기에서 내릴 때는 국장급인 양타오 중국 외교부 북미대양주사장(司長)이 영접했다. 2009년 당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의 방중 때는 차관급이 영접했는데 의전의 급을 낮춘 것으로 보인다. 미국 공화당 일각에서는 블링컨의 방중이 중국에 섣부른 ‘유화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고 우려한다. 트럼프 시절 백악관에서 근무했던 허버트 맥매스터 전 국가안보보좌관은 이날 “블링컨 장관의 방중은 ‘중국 공산당에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라는 인식을 세계에 심어주길 중국 정부는 희망하고 있다”고 했다.